묘청은 고려 인종 때의 승려이며 예언가이다.
그는 풍수지리설을 무기로 인종의 정치적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했다.
서경 천도론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인종은 묘청을 배신했고 묘청은 변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묘청의 난이다.
묘청의 난은 우여곡절 끝에 진압되었다. 김부식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과의 대결에서 지고 말아 그의 웅대한 포부는 물거품이 되었고 현실세계에서는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다. 그래서 조선 말까지도 유학자들은 묘청을 단죄해왔다.
유학자들의 눈에 비친 묘청은 한갓 요망한 승려에 불과했다.
예언과 이적을 빌려 나라를 망치려 든 역적이란 것이었다.
하지만, 난세에 태어난 묘청은 한국의 예언 전통을 종합한 인물이다.
그는 풍수지리설과 음양오행설, 천문과 상서설 등에 정통했다.
국내외의 정세를 보는 안목도 예리했다.
묘청은 북방에서 성장하고 있던 금나라를 쳐서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다.
그의 정치적 지도력도 상당했던 것이 틀림없다. 1135년 묘청은 서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대위라 칭할 만큼 야심적인 인물이었다.
한 때 묘청은 인종읠 전면에 내세워 국가의 중흥을 기도했고 나중에 스스로
황제가 되어 후천개벽의 꿈을 한국 역사에 선사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의 천도론은 후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실상 <정감록>의 숨은 뿌리가 되었다.
십승지설과 후천개벽 사상의 원형이 묘청의 예언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는 묘청의 예언을 중심으로 묘청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묘청의 천도론
묘청의 천도론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정감록>과 일맥상통한다.
<정감록>의 주요골자는 계룡산에 도읍해 새 세상을 열자는 것인데,
묘청의 생각이 바로 그러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예언서<정감록>을 신봉하는
이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하면 나라의 수명은 6백년이요, 36국의 조공을 받게 된다.
사실상 세계 통일 정부가 한반도에 출현할 시운이 오는 것이다.
36국이라면 적은 숫자가 아니다. 36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통적인 지리관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동서남북의 4방으로 나누어진다.
사통팔달이란 말도 있지만 4방은 다시 여럿으로 세분화된다.
눈금에 12간지를 새겨 제작한 지관의 나침반에서 보듯 4방은 다시
12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다시 36으로 미세하게 갈라지기도 한다.
요컨데 36은 온 세상을 포괄하는 상징적 숫자이다.
하지만 36국 조공설을 강력하게 편 사람은 다름 아닌 고려시대 묘청이다.
인종 6년(1128) 고려 수도 개경의 인덕궁과 남경(뒷날 한양에 있던 궁궐)이
연이어 화재를 입었는데 이 무렵 서경 천도론을 펴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서경에 있는 임원역의 지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곳은 음양가에서 말하는
이른바 대화세大華勢입니다. 만약 이곳에 궁궐을 세우고 수도를 옮기신다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습니다. 금나라가 조공을 바치게 되고
저절로 항복해 올 것입니다. 36국이 모두 조공을 바치게 될 것입니다.(<고려사>,
권 127).
묘청은 한반도의 지세를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체로 인식했다.
'대화大華란 大花다. 국토를 한 그루의 나무로 볼 때 가지마다 크고 작은 꽃이
핀다. 이것이 각지의 길지다. 이들 명당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명당이 큰 꽃이다.
그 자리가 평양 임원역에 있으므로 그곳에 궁궐을 지으면 나라가 가장 융성하게(大華)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묘청은 궁궐안에 八聖堂을 설치하자고 제안한다. 국토의 수호신인 여덟
성인을 위해 사당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이들 여덟 성인은 풍수지리와 관계가
깊다. '팔성'에 관한 묘청의 말은 이랬다.
첫째는 호국(護國) 백두악(白頭嶽 백두산) 태백선인(太白仙人)인데 실체는 문수사리보살(文殊舍利 菩薩)입니다.
둘째는 용위악(龍圍嶽 금강산으로 추정) 육통존자(六通尊者)로 실체는 석가불(釋迦佛), 셋째는 월성악(月城嶽 경주 남산으로 추정) 천선(天仙)으로 실체는 대변천신(大變天神), 넷째는 구려(駒麗) 평양선인(平壤仙人)으로 실체는 연등불(燃燈佛),
다섯째는 구려(駒麗) 목멱선인(木覓仙人 목멱은 남산)으로 실체는 비파시불(毗婆尸佛), 여섯째는 송악(松嶽) 진주거사(震主居士)로 실체는 금강색보살(金剛索菩薩), 일곱째는 증성악(甑城嶽 속리산으로 추정) 신인(神人)으로 실체는 륵차천왕(勒叉天王), 여덟째는 두악천녀(頭嶽天女 이른바 지리산 聖母)로 실체는 부동우파이(不動優婆夷)입니다.(<고려사>, 권 127).
묘청이 팔성당으로 거론한 지명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백두산을 비롯해 백두대간의 주요 마디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백두산, 금강산, 속리산, 지리산을 비롯해 송악산과 서울, 경주 남산등이 그것이다. <정감록>에 언급된 길지도 위에 언급한 여러 산과 관련이 있다.
얼핏 보기에 ‘정감록’과 전혀 다른 점도 눈에 띈다.
전국 8대 명산의 실체를 도교의 신선이자, 불교의 불보살로 인식한 점이다.
‘정감록’에는 이런 종교적 관점이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없지는 않다.
부안의 변산이나 보은 속리산처럼 미륵불교의 성지가 십승지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일례로 ‘정감록’의 핵심 예언서에
해당하는 ‘감결’을 살펴보더라도 불교 최고의 성지 금강산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마음속에는 불교의 성지가 바로 최고의 명당이요, 국가의
운명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이런 믿음이 풍수지리사상과 결합해 팔성당이나 십승지라는 관념을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에는 불교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다.‘정감록’에는 불보살의 존재가 그저 간접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더욱이 ‘정감록’을 전국에 전파시킨 술사들이 유교적 교양을 갖춘 평민 지식인들이고 보니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묘청이 팔성당의 건립을 주장했을 당시만 해도 사정은 아주 달랐다.
왕은 화공을 시켜 팔성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당대 최고의 명문장 정지상은 팔성의 덕을 이렇게 찬양했다.“오직 천명(天命)만이 만물을 제어할 수 있고
오직 땅의 덕(土德)만이 사방에 왕 노릇을 하게 돕는다. 이제 평양 한 가운데 대화(大華)의 지세를 골라서 궁궐을 새로 짓고 음양의 이치에 순응하여 팔선(八仙)을
모시노라. 백두산을 받들어 우두머리로 삼으니 밝은 빛이 어리누나.”
묘청은 한국 풍수지리의 비조(鼻祖) 도선국사의 정맥(正脈)을 이었다고 했다.
도선의 후예답게 그는 팔성당 이론을 폈고, 이는 훗날 십승지설로 다시 피어나게
될 운명이었다.
묘청의 후천개벽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정감록’의 이면에 간직된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사상도 실은 묘청에 기원을 두었다는 점이다.
인종10년(1132) 왕이 반포한 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옛 가르침(예언서)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천지가 생긴 뒤 수만 년이 지나면
반드시 동지(冬至)가 갑자일이 되리라. 그때가 되면 해와 달 그리고 수화목금토
다섯별이 모두 정북(正北,子)에 모여든다. 이 때를 상원(上元)으로 삼아 일력의
출발점을 삼으라. 천지가 열린 뒤 성인(聖人)의 도(道)가 이때부터 행해질 것이다.
(<고려사>, 권 16)
이 글은 개경의 구귀족에 맞서 왕권 강화를 위해 부심하던 인종의 이름으로 공포되었다. 그러나 실제 저자는 묘청이었다고 봐야 한다. 당시 인종은 묘청에게 천문과 풍수 등을 일임하다시피 했다.
묘청은 당대 최고의 예언가로서 하늘을 수놓은 일곱 개의 주된 별이 정북에 모이는 동짓날이 되면 후천이 개벽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