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비 땀 줄줄…"또 무슨 일?" |
지난해 '천안함 사태' 후 1년 7개월만에 40여ℓ 흘려 |
양철우 기자 |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밀양시 무안면 홍제사 경내 표충비(경남도지정 문화재 제15호·사진)가 지난 18일 오후 1시부터 19일 오후 1시까지 40여ℓ의 땀을 흘려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해 3월 19일과 4월 1일에 잇따라 땀을 흘려 ‘천안함 사태’를 예고했다는 분석 이후 1년 7개월 만이다. 무안면 홍제사는 표충비가 이날 오후 1시부터 다음날 1기까지 24시간동안 40여ℓ 가량의 땀을 흘렸다고 21일 밝혔다. 표충비의 땀은 비석 전체에 물방울처럼 서서히 맺혔다가 비석 표면을 타고 흘려 내려며,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을 파악치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주민들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와 경제난과 함께 또 다른 국가 중대사를 예고하고 있다며 술렁이고 있다. 이 표충비는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한 사명대사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영조 18년(1742년) 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 스님이 높이 275㎝, 너비 98㎝, 두께 56㎝의 표충비를 건립했다. 한편 표충비는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에 3말 1되의 땀을 흘린 뒤 1910년 한일합방 때 4말 6되, 1919년 기미운동과 1945년 해방 때 각각 5말 7되, 6·25동란 때 3말 8되, 5·16혁명 때 5말의 땀을 흘리는 등 국가의 길흉사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려 화제가 됐다. 밀양/양철우기자 |
사명대사의 구국혼이 서린 표충사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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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表忠寺)는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제약산 남쪽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654년(무열왕 1)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죽림사라 했으며, 829년(흥덕왕 4) 인도의 고승 황면(黃面)선사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할 곳을 동방에서 찾다가 황록산 남쪽에 오색서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하고는 3층 석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절을 중창했다고 한다.
이때 흥덕왕 아들이 나병에 걸려 전국의 약수를 찾아 헤매다가 이곳의 약수를 마시고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쾌유하자 왕이 기뻐하고 대가람을 이룩한 다음 절 이름은 영정사, 산 이름은 재약산으로 바꾸었다.
고려 문종대 (1047~82)에는 당대 고승인 혜린(惠燐)이 이곳에서 수도했고, 충렬왕대 (1275~1308)에는 ‘삼국유사’ 저자인 일연이 주석하면서 불법을 크게 중흥하니 1286년 충렬왕이 '동방제일선찰'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경남 밀양 홍제사 경내 표충비각(表忠碑閣). 땀 흘리는 사명대사비가 안치되어 있다.
1839년 (헌종 5) 사명대사 법손(法孫)인 월파(月坡)선사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고향인 밀양시 무안면에 세운 표충사(表忠祠)로 옮기면서 가람배치가 크게 변하고 절 이름도 표충사로 바뀌었다.
1926년 웅진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 문화재로는 청동은입사향완( 국보 제75호)ㆍ3층 석탑(보물 제467호)ㆍ대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ㆍ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4호) 등이 있다.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해 선사가 태어난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홍제사에 세운 표충비는 일명 사명대사비 또는 표충사비라고 일컫는다.
높이 2.76m, 폭 97cm, 두께 55cm의 웅장한 크기에 오석으로 세워진 이 석비에는 4면에 사명대사와 그 스승인 서산대사의 비명이 새겨져 있다.
사명대사가 입적하던 1610년(광해군 2년)에 임종한 곳 즉 다비처에 세워진 이 비 석의 정식 이름은 '자통(玆通) 홍제존자(弘濟尊者)사명대사 석장비' 이다.
'사명대사 석장비'는 건립 이래 멀리서 들으면 곡소리가 나지만, 가까이 가면 들리지 않다가 다시 멀어지면 곡소리가 들리곤 했다는 신비의 '전설'이 전해왔다.
뿐만 아니라 신기하게도 사명대사비에서는 국가적인 중대사가 생길 때면 어김없이 ‘땀’이 흘러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는 위난을 겪어야 했다.
사명대사비에서 처음으로 땀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7일 전인 1894년 11월19일이었다. 이때 3말 1되가량의 땀이 나왔다고 한다. 두 번째는 국권이 일제에 병탄되기 17일 전인 1910년 7월22일, 또 4말6되의 땀을 흘렀다. 세 번째 기미년 3.1만세운동 3일 전인 1919년 2월27일 5말7되 분량의 땀을 흘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소문이 알려지면서 표충비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각종 유언이 나돌았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탄 직전에 합천 해인사에 있던 사명대사비(표충사비와 다름)가 밤새워 울었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패망이 짙어가던 1943년 해인사의 이 사명대사비가 다시 울었다고 한다.
그 통곡의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지면서 민중은 일제가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한다는 희망에 부풀게 되었다. 해인사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일제 패망의 여론이 비등하자 당황한 합천경찰서가 사명대사비를 4쪽으로 토막내버렸다. 이 비석을 파괴한 일인들은 그 뒤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해인사 사명대사비의 소문과 함께 표충사비에서 한민족의 중대사가 일어난 때는 어김없이 땀을 흘린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일제는 이 비의 처리문제를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
해인사 사명대사비를 토막 낸 일인들의 최후를 전해들은 터라 그렇게 하기도 겁이 났다. 하여 묘책을 짜낸 것이 사명당비의 기(氣)를 없애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표충비의 '기'를 꺾기 위해 풍수적 논리까지 도입했다고 무안리 마을 촌로들은 증언한다. 진등산 정기가 내려와 뭉쳐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표충비 바로 뒤쪽 땅 밑에 일본은 엄청난 규모의 철근을 꽂아놓고 그 위에 담배창고를 건설했다는 것.
서산, 사명, 기허 3대선사를 기리는 표충사 춘계향사.
철근이나 독한 냄새가 나는 담배는 모두 맥을 끊기 위한 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은 사명대사 비석 주위로 일본인 관사와 지서(현 파출소)를 설치해 ‘비석의 기’를 차단하는 한편, 비석 앞쪽에 있던 연못을 메워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만행 때문에 이곳에 살던 일본인들 역시 큰 벌을 받았다고 한다. 마을 경로당에서 만난 한 촌로는 "일제 때 부자, 선생, 상인 등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았는데 여기서 아들은커녕 딸자식 낳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서, 비를 훼손시킨 데 대한 사명대사의 응징으로 풀이한다.〉(신동아. 1997,5)
사명대사 표충비는 해방 3일 전인 1945년 8월12일, 3말8되의 땀을 흘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6.25 전쟁 2일 전인 1950년 6월23일에 3말8되의 땀을 흘렸다. 그밖에 서울수복 15일전, 4.19혁명당일, 5.16군사쿠데타 5일 전, 10.26사태 10일전, 12.12사태 3일 전에도 어김없이 이적을 발휘했다.
지역 주민들은 사명대사의 영험이 현재에까지 이어져 땀 흘리는 신통력으로 나타난다고 믿고 있다. 주민들은 현재의 과학으로도 풀리지 않는다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표충비 땀은 사람 몸에서 땀이 나는 것처럼 비석 사면에서 풍풍 올라온다. 또 그 땀을 맛보면 약간 짠맛이 느껴질 정도로 사람 땀과 흡사한데, 이는 보통 물이 아니라는 증거다.
▲ 표충비 땀이 습기 등 기후에 의한 자연 현상이라고 한다면, 왜 습기를 가득 머금은 장마철에는 한번도 땀을 흘리지 않았는가.
▲ 설령 기후에 의한 자연현상으로 땀을 흘린다 해도 비석에 깊게 새겨진 글자 속으로는 흐르지 않는다. 세로 방향으로 새겨진 한자들 사이, 즉 표면이 매끈한 곳을 골라 흐른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물이란 것은 움푹한 곳으로 흘러드는 것이 상식인데 표충비 땀은 그렇지 않다.
▲ 표충비를 보호하는 비각 기둥은 물론 10m 떨어진 곳에 크기가 비슷한 홍제사 사적비에서는 같은 조건에서도 전혀 땀이 나지 않는다. 또 전국에서 표충비처럼 땀 흘린다는 비석은 아직 없지 않은가.(신동아, 앞의 글)
첨단 과학의 시대에 석비(石碑)에서 땀이 나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쉽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여러해 전 지역 보건소에서 표충비의 땀을 채취하여 지역 보건환경연구원에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결과는 놀랄 만큼 몇 가지 중금속과 함께 인체의 땀과 비슷한 염소성분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자 중에는 밀양 무안면 무안리 지형의 특수성에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 통풍이 잘 되지 않는 지형에서 비 오기 전이나 안개가 낀 날 등 습도가 높은 공기가 불어와 차가운 비석에 부딪히면 이슬이 맞게 되고, 이슬이 제대로 증발되지 않기 때문에 물이 돼 흐르는 현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오석에서 어찌 인체의 땀과 비슷한 염소성분의 수액이 흘러나올 수 있을까. 그래서 '표충의 땀'은 사명대사비 구국의 신통력이라 믿는 승려와 신도들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