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인간은 영(靈)을 알 수 없는가.
이 문제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규명해 내려 했던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새는 틀림없이 자기의 둥지로 찾아온다. 꽃은 계절만 되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그리고 열매를 맺는다.
또 지혜라고는 있을 것 같지 않은 벌들도 사람이 감히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집을 짓고 규율이 있는 집단 생활을 한다.
이러한 일들에는 자연계의 지혜가 작용하고 있다.
인간이 영계나 영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도 실은 육체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연계의 지혜에 의해 작용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계는 그 불가사의한 지혜에 의해서 인간에게 자연적 수명을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과 영계의 존재를, 그리고 그 영원성을 인간이 죽기 전까지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인간이 영의 일을 모르는 이유는 또 한 가지 있다.
인간은 영과 육체의 두 요소로 성립되어 있지만 인간이 자신의 육체에 깃든 영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여기에서 말하는 영의 존재란 인간의 의식, 이성, 사유 등과는 다른 얘기이다.
때문에 자유를 갈구하는 인간은 반드시 자기를 지배하려 하는 영과 대항해 두 요소 사이에서는 투쟁이 벌어질 것이 뻔하다.
또 반대로 인간 속에 깃든 영은 이러한 일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자연계의 존재인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로 영은 인간, 그 자체가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영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기의 전체는 모두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영의 무리 가운데는 흉령이라는 것이 있어 이 영은 자기와 관계있는 자의 생명과 사고를 파괴로 몰아넣으려고 노린다. 만약 이 영이 인간의 육체에 들어가는 경우, 그 육체가 자신이 아니고 인간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당장 그 육체에 해를 끼친다.
그러나 흉령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그것을 자신으로 알고 귀중히 여겨 이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용을 한다. 이처럼 인간사에는 자연계와 영계의 두 세계를 합친 큰 세계의 지혜가 작용하고 있다.
심령학계의 태두로 일컬어지는 스웨덴의 보르그는 이 영계와 자연계에 대해 ‘이 세상이란 영계의 넓고 무한한 공간속에 두둥실 떠 있는 하나의 고무공’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고무공 내부에도 빈틈없이 영계가 스며들어 있는데 고무공 내부는 자연계와 영계의 두 세계가 동일한 공간 속에 공존하고 있다.”
고 말한다.
그는 공간의 시간성에 대해 독특한 이론을 제시한다.
어느 공간에 책상이 하나 놓여 있는데 그곳에다 다른 책상을 놓으려면 그 책상을 치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여기서 시간성을 배재하면 두 책상은 동일한 공간에 놓여 있는 셈이다.
여기서의 시간성은 다분히 자연계의 시간일 뿐이다.
자연계의 관념이라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이 그 성질을 달리하고 있듯이 그것은 엄연히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공간의 성질이 다를 따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영계의 문제를 생각할 때도 이승의 자연계적 물질계적 습관에 젖은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이란 공기라든가 정기(精氣)와 같은 것이거나 혹은 공중에 떠다니고 있는 에테르 같은 것이다.
영은 인간처럼 육체라고 하는 형태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일종의 영체를 갖고 있다. 그리고 지성과 이성이라든가 감각면에서는 인간이 갖고 있는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심령학자들의 일치된 분석이다.
지혜 있게 살려고 하는 사람, 보다 커다랗게 눈을 뜨고 이 세상을 보려 하는 사람들이 영의 세계, 다시 말해 이승, 자연계와는 다른 차원의 4차원의 세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째서 인간은 영을 알 수 없는가에 대한 결론도 머지않아 보편적으로 밝혀질 것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