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증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객관적인 증거물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 친구에게 살해당한 재미교포 청년 영가처럼 자신이 갖고 있던 벨트의 위치를 가족에게 확인시켜 영혼의 존재를 믿게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대전의 의학박사 J씨 영가처럼 부인만 알고 있던 비밀을 말함으로써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대전의 명문가로 유교 전통의 맥을 잇고 있는 J씨 가문의 법도는 매우 까다로웠다. 요즘 같은 시대에 법도를 따지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J씨 가문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런 가문에서 성장한 의학박사 J씨는 의사로 평온히 살다 80세 가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나를 찾아올 당시에 82세였던 J씨의 부인은 남편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었다. J씨의 직업은 의사였지만 삶은 고지식한 조선 선비였다. 놀라운 것은 부인도 의사라는 사실. 당시 여의사라면 최고 엘리트 신여성. 그럼에도 의사와 한 남자의 아내로서 최선을 다해 산 J씨의 부인이 존경스러웠다.
부인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지만 종교를 초월해 구명시식을 청했다. 구명시식 직전, 내게 초혼할 영가를 적은 명단이 왔다. 부인은 별 뜻 없이 J씨 영가를 초혼하는 명단에 그날 함께 온 딸의 이름을 적었다. 이윽고 의식이 시작되자 나는 요령을 흔들며 '행효녀 아무개'가 영가를 모시길 원한다고 했다. 그 순간, 갑자기 J씨 영가가 불같이 화를 내며 '왜 내 딸이 나를 부릅니까? 나는 아들도 있고 집사람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유교적 관습상 딸이 자기를 부르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 황급히 이를 부인께 전하고 딸의 이름을 부인의 이름으로 바꿨다. 그래도 J씨 영가의 표정은 편하지 않아 일단 부인과 대면시켰더니 영가는 '왜 내 수의에 끈을 매지 않았소?'라고 했다. 이를 전하자 부인은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수의는 염습할 때 시신에 입히는 옷으로 남자 수의는 도포와 두루마기, 바지 등으로 되어 있는데 영가가 말한 수의끈이란 바지에 묶는 허리끈을 말했다. J씨 수의의 허리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내막인 즉, J씨의 장례식은 그가 생전에 운영하던 병원에서 치러졌다. 그런데 부인이 J씨 시신의 염습이 끝난 뒤 뒷자리를 살펴보니 덩그러니 허리끈이 남아있었다. 관을 다시 열어 확인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냥 내버려두려니 마음에 걸려 할 수 없이 무덤 앞에서 몰래 허리끈을 태웠다. 부인 혼자만 아는 비밀을 영가가 언급하자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격식을 중요시하는 J씨 영가는 막상 자신의 수의에 허리끈이 없자 무척 화가 났던 모양. 허리끈 얘기가 마무리되자 이번에는 자신의 묘를 자주 찾지 않는 아들을 나무랐다. J씨의 아들은 미국에서 살고 있어 한국에 나오기 힘들었다. 그러나 J씨는 아무리 미국에 살아도 성묘를 게을리 하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며 호통을 쳤다.
만약 영혼의 존재가 거짓이라면 관에 수의끈을 넣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후 'J씨의 수의끈 사건'은 영혼 존재를 밝히는 대표적인 사건이 됐다. 그 날 나는 남편 영가에게 미안해하는 부인을 위로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구한말 미국에 통신사를 파견했을 당시 배가 풍랑에 정신없이 흔들려 승선한 사람 모두 바닷물이 들이치는 갑판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다. 하지만 조선 통신사 중 한 명이 갑판에 등을 대고 누워 막무가내로 버티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갑판에 누워 있냐고 물었더니 '내가 여기서 죽으면 관을 땅에 묻을 수도 없는데, 칠성판(관 밑바닥)이라도 대고 있어야 한다. 그냥 이대로 죽게 놔둬라'고 했다. 의학박사 J씨 같이 고지식한 선비에게는 죽음보다 격식이 더 절박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