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증산도
일제 치하 보천교의 대한독립운동 비사秘史
보천교(증산도의 일제시대 명칭),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항일비밀결사 투쟁' 에 혁혁한 공헌
올해는 우리 나라가 일제식민지가 되었던 경술국치(1910년)로부터 꼭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 당시 천도교, 대종교 등의 민족종교와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계가 독립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전개하였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 당시 증산 상제님을 신앙했던 보천교(증산도의 전신)가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항일비밀결사 투쟁’에 혁혁한 공헌을 했던 사실은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보천교는 선도, 태을교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인구 2명중 1명이 신앙했던 '보천교(증산도)'
지난 2009년 STB상생방송에서는 <조선총독부 특명-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라>라는 특집다큐를 제작 방영하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일제 당시 미국 총영사관이었던 밀러의 미 국무부 문서‘( 조선에 관한 보고서’)를 참조하여 민족종교 보천교의 규모와 신도 수, 독립운동 활동 등을 자세히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일제는 1921년부터 보천교 탄압활동을 본격화 하였는데, 그 당시 보천교 신도수가 6백만명에 달했을 정도로 교세가 막강했다고 합니다. 어린이나 노인을 제외한다면 당시 조선 인구 2명 중 1명 꼴로 보천교를 신앙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일제의 노예나 다름없던 조선백성들은 ‘다가올 후천선경 세계에서 한민족이 주역이 된다’는 메시아적 구원사상을 품은 보천교의 교리에서 새 희망을 발견하고, 구름처럼 몰려들어 구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새 나라 건설의 비전을 제시한 보천교를 ‘정치적 성향의 비밀결사체’로 간주하여, 1914년부터 보천교를‘반일反日단체’로 규정하고 집중조사, 감시를 하다가 1922년부터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1936년엔 보천교를 완전히 해체시켜 버렸습니다.
독립운동의 자금조달의 주역 '보천교'
당시 여러 신문과 문헌에 기록된 보천교의‘독립운동 활동’관련 기사를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1)“선도仙道를 표방하는 비밀(항일)단체 대검거”- 동아일보 1921년 4월26일
원래 선도교는 4년전 제주도 의병사건의 수령, 차경석을 교주로 삼아 은밀히 국권회복을 도모하되, 교도(신도)가 5만5천명에 달하면 일제히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바 … 원산경찰서에서 체포된 교도는 100여명이나 실제수는 수만명이라 … 이 교도는 독립자금으로 많은 돈을 냈는데…
2)“태을교인의 독립운동”- 동아일보 1921년 8월6일
박희백은 … 태을교에 가입하여 은밀히 조선 독립을 운동코저 했고, 교주 차경석은 조선이 독립되면 그 나라가 계룡산에 도읍하고…
3)“무과출신으로 독립운동”- 동아일보 1921년 10월31일
김홍식은… 육군참위가 되었으나… 군대가 해산되었고… 재작년 3월중에 조선 각지의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기회를 엿보던 중… 태을교도 백남구와 상의하고 수만명의 교도를 모으고 수백원의 돈을 모금하던중 발각 체포되어…
4)“ 제주 법정사 사건(항일무장 봉기)”- 명치 백년사총서 247쪽
대정 7년(1918년)에 국권회복의 미명 아래 차경석 및 김연일 등이 서로 모의해… 제주도 법정사에서 교도 30명을 소집…
5)“십만원의 독립자금”- 동아일보 1921년 10월29일
…임시정부와 연락하여 조선독립을 달성코자 교도에게 모집한 돈을 군자금에 쓰기로 결의하고, 그 돈은 김홍규가 보관하기로 되어… (참고: 독립지사 김홍규 선생은 불교계에서 잘 알려진 탄허스님의 부친이며, 보천교 간부로서 독립훈장을 받았다)
6)“민족운동 자금으로 30만원 반출”- 동아일보 1926년 11월14일
…보천교를 통해 30만원 거액을 변통하여 만주에 있는 조선 민족운동 단체로 보내려던 사건의 공판이 열렸다… 피고들은 모두다 보천교도들로…
7) 보천교 독립운동에 관한 논문을 쓴 전북대 이강오 전前교수의 1991년 10월19일 신문기자와의 인터뷰
“…증산의 24인 제자(성도)들 모두가 동학인들이었다… 삼덕교의 이치복은 그의 아들 치백에게 증언하기를“…구릿골에 가보니, 증산의 제자들은 모두가 반일反日단체였다”고 했다…”
8) 1936년 사망한 차경석 교주의 차남 차용남의 1991년 1월21일 기자 인터뷰 구술 내용
“김철수(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씨도 부친께 3만원, 2만원 두차례 받았고…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등도 비밀리에 교본소(=보천교 본소)에 다녔으며… 송진우, 장덕수가 군자금을 비밀리에 받았고… 송진우는 당시 보천교 외교담당 차석으로 간부였다. 송진우는 당시 권총단(독립자금)사건으로 옥고 치른 후 상해 임정으로 돌아갔으며…”
위의 여러 기록과 증언을 통해,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활동하던 모든 민족독립 운동 지사의 활동자금을 대주던 물주物主가 바로‘보천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천교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끈질기고 잔혹한 탄압으로 한때 주춤거리긴 했지만, 1936년 일제에 의한 보천교 강제해체 전까지 꾸준히 지속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