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예언가 정렴은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더불어 조선의 3대 기인으로 손꼽힌다.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도사이며 다재다능한 선비였다.
그는 사상적 중심은 유교에 두고 유. 불. 선 삼교에 두루 통달했다. 물론 이런 평가는 조선시대가 유교를 국시로 삼았기 때문에 나온 말일 수도 있다. 동양예언가 정렴은 <주역>과 풍수지리에 밝았고, 도가적 수련을 즐겼다. 정렴은 굉장히 높은 수준의 예언가였다고 전하는데, 한번 산에 들어가 며칠동안 마음을 가다듬고 수양한 다음 내려올 때면 산 아래 1백 리 간에 일어난 일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훤히 알아맞혔다고 한다. 사람들은 정렴이 신기한 인물이라 믿었고 특히 지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보았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언젠가 정렴의 사촌 형제가 아버지의 묏자리를 부탁하러 왔다고 한다. 정렴은 마지못해 묏자리 하나를 점지해 주었는데 땅을 파자 온통 물구덩이였다. 모두 당황했으나 정렴은 시종일관 그 자리만을 고집했고 결국 구덩이에 큼지막한 돌멩이 몇 개를 채워넣고 장례를 마쳤다. 이른바 수중명당인데 훗날 무덤안에 채워넣은 돌멩이 숫자만큼 무덤 주인공의 자손들이 문과에 급제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동양예언가 정렴의 능력은 세속을 벗어난 곳에서 빛났다고 전해지는데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서 정렴을 김시습, 권극증, 이지함, 곽재우에 비견대는 조선 최고의 도사로 손꼽는다. 그만큼 도술과 예언이 능했다는 것이다. 정렴의 아버지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보낸 인물이었기에 그는 세상을 등지고 숨어살다시피 했다. 그의 실제 인생은 어둡고 우울했으며 그의 초인적 능력에 대한호평은 대부분 사후에 내려진 것이다. 여덟 줄의 백성이 다섯달 동안 시체로 쌓일 것이다. 이 예언서의 요점은 말세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비명횡사한다는 것이다. <북창비결>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점은 난세를 극복할 사람을 밝혀놓은 점이다.
재물에 인색한 사람은 먼저 집에서 죽고, 아무 재주도 없는 선비는 저절로 길에서 죽는다. 지혜와 덕이 부족한 사람은 애써 십승지 같은 데를 찾아 피난해도 결국 "아무 쓸모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하늘에서 떨어져 죽는 기러기 신세를 후회하리라"고 했다. <정감록>과 <북창비결>은 하나같이 말세에 피난할 장소를 거론하고 있으며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의 덕성을 온전히 갖추는 일이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