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은 인간 개개인뿐만 아니라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해왔고, 문화와 문명에 뿌리 깊게 영향을 미쳐 왔다. 즉 질병은 인간의 사회와 문명이 만들었던 것이다. 전쟁이나 빈곤이 온갖 질병의 온상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의식주의 상태는 질병의 상태를 규정한다. 식탁의 메뉴는 그대로 질병의 카탈로그에 꼭 들어맞고 의복의 패션, 난방 조명등의 주거 생활 스타일이 한 시대의 질병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하고 있다.
또한 문명의 교류는 질병의 교류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오가고 물건이 오가면서 질병도 전해진다. 거꾸로 질병은 문명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움직이게 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를 멸망케 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질병이었다. 중세 말기 유럽을 뒤덮었던 페스트는 근대사회를 여는 진통이 되었고 발진티푸스는 나폴레옹을 러시아에서 패퇴시킨 원인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 질병은 분명히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다. 천연두와 같이 사라진 질병도 있지만, 에이즈라는 후천성면역결핍증처럼 새롭게 생겨난 질병도 있다.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후 질병도 그때까지의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만든 문명이나 사회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겪어왔다.
인간 생활의 기본인 의식주는 무엇보다도 질병과 오랜 관련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기아와 과식은 질병의 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기에서 기아와 과식은 말할 것도 없이 문명과 사회의 소산이다.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네릿사라는 시녀는 나머지 음식 까지도 다 먹으면 오히려 굶주린 사람과 마찬가지로 결국은 병이 생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19세기 유럽에 유행처럼 발생했던 제왕 병은 사치스런 식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식량사정의 악화로 인해 심장혈관 병이 감소했다가 전쟁 뒤 다시 먹을 것이 본래대로 되돌아오자 이러한 질병이 증가했다. 특히 사회 경제적으로는 빈곤이 질병과 오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질병의 계급성이라는 문제도 생겨났다.
역사 세계에서 오랫동안 문명을 이끌어 온 유럽에서 각 시대와 사회의 나쁜 돌림병을 대강 살펴보면, 13세기의 나병, 14세기의 페스트, 16세기의 매독, 17∼18세기의 천연두·발진티푸스, 19세기의 콜레라·결핵, 20세기 초의 인풀루엔자 등을 열거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암과 심장병이 나쁜 돌림병인 것이다.
질병의 역사는 답답하고 침침하고 참혹하다. 우리는 질병의 역사를 파악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겸허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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