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부님께서 말씀해 주셨듯이 우주는 크게 두가지 일 밖에 안합니다. 생명을 낳고, 그 다음에는 그 생명을 죽이고, 또 생명을 낳고 죽이고, 또 낳고 죽이고....이것만 무한하게 반복합니다. 우주는 '가을철에는 죽이는 공사밖에는 안 본다'고 한마디로 정리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증산도는 가을개벽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단체인데 이것은 우주섭리에 거스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주 이치적으로는 다 죽어야 하는 때에 생명이 살아남게 된다는 것은 우주변화 원리적으로 보면 참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제님께서도 우주변화 원리 밖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인데 천지이법에 의해서 생명이 다 죽는 이 때 어찌 생명을 살려서 선경세계를 건설한다는 것일까요?
상제님 말씀대로 '그래로 인간 씨종자는 남겨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인정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우주변화 원리적으로는 여전히 이해가 안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상화(相火)가 무엇인지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주변화원리 책에서의 개념적인 이해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상화란 '뿌리가 없는 불(無根之火)'입니다. 뿌리가 없다는 말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에 상응하는 음양짝이 없다는 말입니다. 뿌리라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 말고도 좀 더 형이상학적으로 뿌리란 '해결책', '해법' '정답', 영어도 표현하면 solution 혹은 answer(답)이라는 의미도 가집니다. 중학교 때 2차 방정식의 근(根)의 공식을 배우셨을 것입니다. 바로 근, 뿌리라는 것은 해결책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뿌리란 곧 해결책이다'라는 사고는 원래 동서양의 언어세계에서 다 그렇게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증산도의 원시반본 사상도 곧 그러한 만고불변의 법칙, 문제(火)를 해결하는 해결책은 뿌리(水)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문제는 곧 불이고, 해결책은 물입니다.
그렇다면 뿌리가 없는 불이란 곧 '해결방법이 없는 문제'를 의미합니다. 이 사회가 해결책이 없는 문제로 가득찬 이유는 바로 인신상화가 세상에 가득찼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문제가 있으면 해결책도 있다'는 말도 있고, '문제가 있는 곳에 해결책도 있다는 말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해결책이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에게 엄청난 좌절을 안겨주는 말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음양짝이 있기 마련이고 모든 불은 물에서 나오는 것인 우주의 법칙인데 이 '상화'라는 불기운은 그 자신이 '물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불기운과 맞붙여서 불기운을 끌 물기운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가 없이 나온 자식인 것입니다. 참 신기하죠.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우주변화 원리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결책(水)을 만들어내면 또 그에 상응하는 문제(火)가 음양짝으로 또 발생합니다. 그래서 상화라는 불은 일단 한 번 생기면 엄청난 속도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하여간 이러한 인신상화는 이토록 인간에게 좌절을 안겨주고 세상의 모든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가득차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우주에서 가을철에 생명이 다 죽지 않고 그 중 일부는 살게되는 매개체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음양의 법칙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음양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알고보면 매우 허무한 법칙입니다. 태사부님 말씀대로 봄에 생명을 낳아도 가을에는 다 죽이는 것이 바로 음양의 원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결국은 합해서 0이 되는 제로섬(zero sum) 게임이 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양의 법칙은 근본적으로 '상극의 정신'와 '허무의 정신'을 내포합니다. 상극이란 쉽게 말해서, 전체 총합은 0이되는 제로섬 게임이란 의미입니다. '누군가 잘되면 누군가는 손해볼 수 밖에 없는 이치'라는 의미지요. 그래서 이 이치가 선천을 지배한 이치라고도 얘기하는 것입니다. 나와 남이 동시에 잘 된다는 것은 선천 상극의 이치하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 희생해야 남이 잘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선천입니다. 우주자체의 상극성은 우주의 법칙을 뛰어넘는 어떠한 존재가 나타나지 않고서는 극복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상극성을 뛰어넘어 상생이라고 하는 새로운 질서를 열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천지의 음양이치를 이법적으로 도통한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에 괜한 허무감을 느끼는 것은 결국 천지의 이치는 '상극'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상극을 오행에서 상극, 상생과 혼돈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괜히 일벌리면 문제만 생기고 결국 다 헛된 것이니까 가만이 있으라는 노자의 무위사상도 나름대로 이해가 갑니다.
무근지화(無根之火)는 우주의 고통과 좌절이자 곧 희망인 것입니다. 소립자의 세계에서 입자와 반입자가 서로 만나면 사라지듯이, 세상 만물은 아무리 현실세계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면서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어둠속에 숨어있던 반대짝을 어느순간 만나면서 소멸되는 허무한 운명을 타고난 것인데, 반대짝이 없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최근 나온 우주창조 이론 중 하나에서는 우주가 탄생하게 된 이유가 우연히 생겼던 우주가 동시에 생겼던 반대짝이 조금 일찍 소멸되는 바람에 서로 만나지 못해서 외톨이로 남아서 지금 우주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영원한 왕따가 되어버린 우주가 불쌍하죠?) 무근지화는 바로 우주에 한 번 생겨난 이후에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기운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상화라는 불기운 속에 잠재된 영원성을 어떻게 생명의 열매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바로 거기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의 필요성이 등장하게 됩니다. 무근지화를 상대할 수 있는 뿌리없는 물기운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물기운을 제가 굳이 이름붙이자면 말그대로 '무근지수(無根之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의 뿌리란 반대로 불(火)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 물의 뿌리는 불이고, 불의 뿌리는 물이니까요. 그런데 보통 뿌리(體)는 음(水)이므로, 무근지수보다는 무화지수(無火之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하겠네요. 결론을 말하자면 태을주 수행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불없는 물, 문제는 전혀 발생시키지 않는 해결책, 댓가없는 사랑, 너도 잘되고 나도 잘되는 기운, 상생의 기운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주변화 원리에서는 지축이 바로 서면 이것이 다 해결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반쪽의 해결책에 불과합니다. 증산도가 없이 무조건 개벽만 오면 다 죽게 되는 것은 도전에도 나온 내용입니다. 이제까지 쌓여온 원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주의 법도를 벗어난 말, 생각, 행동을 마구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대부분의 행동이 결국은 자연의 이법, 음양이론, 인과론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을 가장 깊이 있게 깨달은 사람이 석가모니 부처입니다. 아무리 잘나서 날뛰는 인간도 결국은 죄를 피하지 못하고, 병을 피하지 못하며, 죽음의 벽을 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뛰어들자면) 그러나 인간의지로 하는 행동중 딱 한가지만이 그러한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여 오히려 자연, 우주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그것이 바로 청수 모시고 태을주 읽는 것입니다. 바로 우주의 근본이 되는 태을천 상원군님의 기운 때문입니다. 천지의 뿌리가 되는 태을천 상원군님은 천지에 귀속된 인간 중에서 오히려 그 천지의 틀을 깨고 나오는 인간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대기업의 회장도 꽉 짜여진 조직의 틀 속에서 순응만 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약간 제멋대로 하면서 창의적으로 일을 만들어가는 사람을 속으로는 더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청수모시고 태을주를 읽으면 그만큼 사랑의 기운, 상생의 기운이 세상에 퍼집니다. 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이해하신 분이라면 '상생'이라는 것은 우주의 음양이론을 뛰어넘는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약간 부가적인 얘기를 하자면, 증산도의 진리가 상생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증산도의 성장과 나의 성장을 이루는데 있어서 그에 따른 부작용이나 문제점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상제님께서 김형렬 성도님께 '우리 두 집안이 망해서 천하가 성공하는 공부를 하겠느냐'고 여쭈십니다. 그 때 김형렬 성도님의 생각을 잘 읽어야 합니다. 그 때 김형렬 성도님은 내가 망해서 남이 잘되게 하겠다고 생각하셨다기 보다는, '천하가 성공하면 결국 나도 성공하는 것 아닌가(천하에는 나도 속해있으니까)'하는 식으로 생각을 하십니다. 결국 증산 상제님의 말씀 속에 얼마나 오묘하게 상생의 정신이 녹아있는지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물며 파리죽은 귀신의 원한이라도 붙지 않게 천지공사를 짜놓으신 상제님의 정신 속에 바로 소위 '무화지수', 댓가없는 사랑, 뿌리없는 물의 정신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수(水)기운입니다. 덕(德)을 물의 성질에 비유한 노자도 이러한 맥락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증산도 정신의 화신이신 태사부님께서도 '상제님은 댓가없이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오히려 나(태사부님)는 상제님하고도 달리 아무댓가도 없이 다 주지 않느냐'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증산도의 본질이 다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다 댓가가 있는 것이 우주의 음양이치인데, 댓가가 없다는 것은 또한 참으로 이치에 벗어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지의 음양의 이치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상극의 정신, 즉 음이 커지면 양이 줄어들고 또 그 반대도 성립되는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생이라는 말 자체에는 '영원', '자유', '독립'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참고로, 영어로 자유(free)라는 말에는 댓가가 없다, 즉 공짜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댓가없는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한다고 종교단체마다 떠들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증산도의 태을주 수행을 통해서 밖에는 그러한 기운을 창조해 내지 못합니다.)
이 천지는 음양의 이치를 조금도 벗어날 수 없지만 인간의 정신은 오히려 이러한 음양의 이치를 벗어날 수 있기에 인간의 정신이 천지보다 더 크다고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인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태을주 수행을 하는 인간'에 한에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을주를 읽어야 참인간이지 그 전에는 인간도 아닌 것입니다.
원래 천지가 생겨난 바탕자리의 근본 정신은 상생(德)인데, 천지가 운행하는 법도는 상극이다 보니 천지일월의 기운을 받고 나온 인간이 상극의 법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므로, 천지를 낳은 무극자리의 상제님이 직접 이 세상에 오지 않고서는 인간들을 상극의 틀에서 꺼내주지 못하는 이치입니다. 천지의 근본이 되는, 즉 음양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극 세상의 기운을 받고 오신 상제님의 기운이 바로 태을주의 기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일은 남죽을 때 살자는 일이고 남 살때 부귀와 영화를 누리자'는 일이다라는 말씀은 우리가 사욕을 채우는 자세로 신앙을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상제님 진리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는 말씀이십니다. 무극대도라는 개념은 극이 없는, 즉 양극, 음양이 없는 진리임을 의미하고, 이것은 곧 상극이 없는 상생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천지음양의 기본틀 조차 초월하여 천지생성 이전의 그 근본목적을 실현하는 진리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지의 법칙조차도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는 스스로의 생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인간 밖에 없기 때문에 우주는 인간을 통해서만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지의 이법을 깨울칠 수 있도록 언어와 문자, 숫자를 가진 인간만이, 천지의 근본인 율려의 소리를 스스로 낼 수 있는 성대구조를 가진 인간만이 상극의 질서 속에서 상생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보다 나은 자식만이 부모의 이상을 실현시켜줄 수 있습니다. 하물며 상제님께서도 우주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하시지만 오히려 태사부님, 사부님 그리고 우리 일꾼들은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일꾼들이 상제님보다도 더 위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천에 기독교, 불교, 유교가 성장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고, 또 죽여야 했습니까. 하물며 종교가 아닌 어떤 사상, 이데올로기나 철학의 성장을 위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제님 진리권이 확대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파리 한마리 원한도 붙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그 상생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관념이 서로 투쟁하면서 확장되어 가는 것을 설명하면서 리차드 도킨스라는 학자는 '관념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저는 태사부님이 사용하시는 상제님 '진리권'이라는 표현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태을주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태사부님 사부님께서도 늘 태을주 읽는 만큼 일이 된다는 표현도 바로 그 말씀이십니다. 또한 상제님께서 내밥을 먹는자라야 내일을 하여 주리라는 말씀도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증산도 진리는 자연섭리이기 때문에 억지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 기운이 실제로 만들어 져서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증산도가 자연섭리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인간이 태을주 수행을 하는 것은 우주변화원리적으로 어떠한 변화작용이 우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선천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상화, 즉 무근지화를 없애는 수기운을 만들어내어 우주에 영원불멸의 생명을 만들어내는데 그 핵심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전에 적은 글에서 상화(相火)는 선천 모든 문제의 가장 핵심이 되는 원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얘기를 한 것이고, 우주의 완성을 위해서는 그러한 원한의 과정을 꼭 거쳐야만 한다고 얘기한 것도 그러한 우주변화의 원리를 기본에 깔고 한 얘기입니다. 원한은 그것을 발생시킨 원인이 없어져도 그대로 남는 불기운이기 때문에, 그리고 해결할려고 할수록 더커지기 때문에 상화의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이유에서 증산도 사상의 출발이 바로 '해원'이 되는 것입니다. 태사부님 사부님께서도 해원이 되야 상생이 된다는 말씀도 그러한 의미를 가진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상생의 진리(무근지수)만이 원한(무근지화)을 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변화 원리 책에서는 선천의 모순이 지축이 서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지축이 서더라도 이러한 불기운이 해결되지 않으면 생명은 다 죽습니다. 그래서 김일부 선생님은 인간으로 오시는 하느님이 계셔야 우주는 성공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그런지에 대해서, 김일부 선생님의 정신세계의 궁극점까지는 한동석 선생님이 이르지 못하신 듯 싶습니다. 하느님이 왜 인간으로 오셔야 하는지, 왜 태을주 수행을 통해서만 우주의 이상이 실현되는지를 정확히 깨닫고 계시지 못한 것입니다. 인간정신의 완성은 인간의 의지와 절제로 가능한 것인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적은 얘기는 우주변화원리 책에 나와있는 내용만은 아닙니다. 우주변화원리 책에 인간정신의 완성을 가능하게 하는 '태을주 수행' 얘기가 없으니 결국 정신론에서 알맹이를 빼놓은 격이 되므로 그러한 약간의 빈공간이 있음을 여러분들이 알고 우주변화원리 책을 보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글을 적습니다. 한동석 선생님이 태을주를 알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한 그분의 한계점 때문에 우주정신의 완성에 대한 명확한 해법인 증산도에 대한 언급까지 글이 미치지 못하고, 다만 지축 정립, 그리고 더 나아가 술(戌)자리 기운을 타고난 지도자에 대한 언급까지는 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인신상화를 통해서 금화교역을 거쳐 우주의 정신(태극)을 완성하는 과정에 있어서 태을주 주문 수행은 우주변화원리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증산도는 곧 자연섭리가 되는 것이고, 결코 어떤 한 종파의 교리가 아닙니다.
과거에 우주변화원리를 상당한 수준 통달했지만 증산도 신앙을 배신한 몇몇 사람들의 예를 보고 저는 마음이 너무도 아팠습니다. 우주변화원리를 통해서 상제님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고자 하는 꿈을 접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수행과 정성, 참된 마음, 상생의 마음이 없이 상극의 기운을 가지고 단순히 지식적으로 우주변화원리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기간을 정해놓고 주입식, 암기식으로 공부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가 우주변화원리 책에 나온 것만으로 증산도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굳이 그 틀에 맞추자면 증산도의 태을주 기운은 무근지수(無根之水)와도 같다고 하는 그런 표현까지 만들어가면서 글을 쓴 이유는 작은 틀의 지식에 증산도의 무궁무궁한 진리를 꿰어맞추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또한 수행을 병행하지 않은 지식공부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으셨으면 합니다.
태을주를 통해서 상제님의 도법세계를 깨닫고 많은 책을 읽어봤지만 그 세계는 참으로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세계임을 느낍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히 전달하고자 한다면 좀 더 길고 자세하게 글을 적어야 옳겠지만, 나름대로 함축해서 적었지만 벌써 내용이 너무 길어져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차후에 적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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