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세계 문명사상 독특한 발명품이며 세계화 시대 한국의 대표적 문화상품이기도 하다. 건국 60년을 맞은 올해 한글·한국어 관련 학술대회와 행사들이 잇따라 마련됐다. 국어 순화와 같은 대내적 언어 정책의 문제보다 한글의 세계화 같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특징이다.
16일 고려대에서 개막한 한글 국제학술대회는 18일까지 한국어학회(회장 홍종선) 주최로 진행된다. 6개국에서 500여명의 학자가 참가해 언어학적 논의뿐 아니라 한글과 세계화, 디자인 산업으로서 한글의 가치 등을 논한다. 국립국어원(원장 이상규)은 22~23일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국어 사랑 큰잔치’를 개최한다. 국어 관련 교수·교사, 언론사 교열기자, 한글 디자이너 등 전문가 500여명이 모여 세계화 시대 한국의 국가 브랜드가 되고 있는 한글의 가치와 미래를 짚어본다. 한글학회(회장 김승곤)는 29~30일 건국대에서 한글학회 100돌 기념대회를 연다. 한글학회는 조선어연구회 창립(1921년)을 기준으로 기념일을 삼아오다 1987년 총회를 통해 국어연구학회 창립(1908년 8월31일)을 기점으로 삼았다.
◇높아가는 한글의 국제적 위상=언어학자 수전 로메인에 따르면 한국어를 쓰는 인구는 7500여만명으로 전세계에서 12번째로 많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구 수가 많은 중국·인도 등에서 쓰는 방언을 따로 계산했기 때문에 실제 한국어 사용 인구는 세계 10위에 해당한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다. 외국인 대상의 한국어능력시험(토픽) 응시자수도 1997년 2274명에서 지난해 7만2292명으로 10년새 30배 가량 늘었다. 지난해 국제특허협력조약(PCT)에서 한국어는 10개 국제 공개어 중 하나로 채택되기도 했다.
한국어의 국제적 확산에는 한류의 영향도 크다. 일본에서 한국어 강좌를 하는 곳은 사설 학원을 포함해 3000여 곳. 세계에서 한국어 강좌가 개설된 대학은 90년 32개국 151개 대학에서 지난해 64개국 742개 대학으로 늘었다. 국립국어원이 추진하는 해외 한국어 강좌인 세종학당은 지난해 첫 개설돼 올 상반기까지 전세계 17곳에 만들어졌다. 김승곤 한글학회 회장은 “해방 이후 ‘한글 세대’의 힘이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일어서게 했다”며 “이제 우리말을 세계에 널리 펴 보이는 일을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세계문자’로서 한글의 가능성=최근 학계 일부와 민간 단체 등에서 한글 자모를 국제적 문자 표기 수단으로 보급하자는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영어의 알파벳처럼 한글 자모를 언어 표기 수단으로 삼자는 주장이다. 한글은 세계의 어떤 언어 문자보다 음성을 그대로 옮기는데 뛰어나다는 평가도 있다. 한글 창제의 목적이 우리말의 표기뿐 아니라 중국 한자음의 표기에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네팔 오지에 사는 ‘체팡’이라는 소수민족의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려는 시도가 3~4년 전부터 있어 왔다. 동티모르의 떼뚬어는 영어 철자로 표기하고 있으나 발음을 정확히 적기 어려워 한글로 대체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다. 컴퓨터 작업시 일본어나 중국어의 경우 영어 알파벳으로 발음을 적어 넣은 뒤 해당 문자로 바꾸는 번거로운 현실을 고려한다면, 한글의 문자적 우수성은 IT시대에 더욱 돋보인다.
문자가 없는 민족에게 한글 표기체계를 갖춘 휴대전화를 보급하자는 제안도 있다. 무(無)문자 민족이 한글 문자체계를 빌어 그들의 말을 시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학계에선 이런 움직임에 신중한 입장이다. 홍종선 한국어학회 회장은 “이런 방식의 한글 세계화는 민족적 우월감을 갖게 하지만 실효성에선 의문의 여지가 있다”며 “한국어가 아직 널리 쓰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소수 민족에게 한글 보급을 추진하면 부작용이 클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어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견해다. 이준석 국립국어원 연구원은 “한국어를 배우지 않고 한글 문자 체계만 익히는 것은 쉽지 않을뿐더러 문화적 부가가치가 높지도 않다”고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배노필 기자
이상규 국립국어원장 “한글 문자 조형미 널리 알려야”
이상규(사진) 국립국어원장은 “건국 60년을 맞아 한글 정책도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며 “지금까지 ‘모국어 지키기’라는 소극적 언어정책이었다면 앞으로는 ‘우리말 나누기’라는 적극적 정책으로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어 정책 변화가 왜 필요한가.
“지금까지는 일제 강점기 영향 탓에 ‘식민지 언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어적 자세가 많았다. ‘한글 지키기 운동’ 같은 것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았나 싶다. 이젠 모국어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한글의 우수성을 전세계와 나누는 운동 방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글 우수성을 나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세계화라는 말은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느낌이 든다. 문화 교류의 의미로 ‘한글 나눔’이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한국어 수요층이 한글을 배울 수 있는 여건을 적극적으로 마련해 주자는 것이다. 2000년도 이전만 해도 한글 학습은 유학생이나 외교관 등 소수의 관심사였다. 한국의 문화적 상상력이 폭발하면서 이제 인터넷, 공연 무대, 조형 미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한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일본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잠재 인구가 40만 명에 달한다는 조사도 있다. 이들에 대한 다양한 지원이 필요하다.”
-한글 문화의 활용에는 어떤 것이 있나.
“한글은 미학적·조형적 가능성도 풍부한 문자다. 보도 블록, 타일 디자인에도 한글의 조형미를 살릴 수 있다. 유네스코 본부, 영국 빅토리아 박물관 등에는 한글 디자인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이런 식으로 한국어 학습뿐 아니라 한글 문자 자체의 조형미가 널리 알려지는 것은 곧 한국의 문화권역이 넓어지는 것이다.”
-한글 정책은 맞춤법 강조나 한국어 순화 등 규범적인 느낌이 강했다.
“일방적인 국어 찬양론자가 돼선 곤란하다. 국민이 모국어를 쓰면서 스트레스를 너무 받게 해선 안 된다. 언어 사용자·소비자 중심의 정책으로 가야 한다. 외국어 지명·인명 표기 등은 인터넷상에서 자동 전환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보급할 계획이다.”
-세계적으로 언어 다양성이 강조되고 있다.
“다문화 시대엔 다양한 언어 학습이 중요하다. 다문화 가정이라면 한국어 외에도 어머니·아버지 나라의 말도 함께 배워야 한다. 그래야 한국어 사용 인구의 외연도 넓힐 수 있다. 다른 한편 자국어 내에서도 언어 다양성이 훼손되고 있다. 다양한 지역·계층 언어가 가진 풍부한 한국어 어휘가 소멸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어 표준대사전이 고작 3권짜리다. 일본은 33권이다. 국가 차원에서 언어 지식 자원을 하루빨리 수집하고 보존해야 한다.”
배노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