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의 개척사
증산 상제님께서는 당신의 대업이 크게 세 번의 마디를 거쳐 이루어진다고[삼변성도三變成道] 하셨습니다. 증산도의 실질적 역사는 1871년 상제님 강세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상제님으로부터 종통을 받으신 태모님이 1911년 정읍에서 교단을 여시고 상제님 진리를 펴기 시작하면서부터 교단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증산도는 보천교로 이름을 바꾸고 포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세계 종교사에 유례없는 폭발적 성장을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800만 명 정도였는데 보천교 신도가 600만 명에 달했습니다. 3명 중 1명이 태을주를 읽으며 증산 상제님을 신앙했던 것입니다.
보천교는 신앙 단체이면서 동시에 물산장려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독립운동의 주요 자금원 역할을 하는 등 독립운동의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항일운동 관련 기사를 보면 증산계열 147건, 기독교 23건, 불교 18건, 천주교 2건, 유교 15건이 나타나는 데에서도 이러한 사정을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급격한 세력 확산과 독립운동 지원을 두려워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보천교는 쇠퇴합니다.
어렵게 명맥이 이어져 오던 증산도는 해방 후, 집안 대대로 상제님 신앙의 불씨를 간직해 온 안운산 태상太上종도사님의 혈심으로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고, 이때에 수십만 신도가 상제님을 신앙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또한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무산되고, 이러한 시대 상황이 이어지면서 기나 긴 휴계기休契期를 거치게 됩니다.
그 후“삼천三遷이라야 내일이 이루어 지느니라”, “갑을甲乙로 기두하라”는 상제님 말씀대로, 1974(갑인)~1975(을묘)년 안운산 태상종도사님과 안경전 종도사님이 또 다시 부흥을 이뤄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안운산 태상太上종도사님
상생의 새 문화를 일으키는 현재의 증산도 교단을 낳아 주시고 길러주신 분은 안운산安雲山태상종도사님입니다.
태상종도사님은“일실건곤一室乾坤을 평화낙원平和樂園하리라”라는 평생 시를 지으시고, 상생의 세상을 이룩하시기 위해 일평생을 상제님 진리를 알리는 데 헌신하셨습니다.
태상종도사님은 임술(1922)년에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시어 부친의 영향으로 상제님을 신앙하면서 자라셨습니다. 9세 때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청풍명월금산사淸風明月金山寺’라는 성구를 입춘서로 쓰시며 당신의 포부를 밝히셨습니다.
12세 때 2주 동안 수련을 하시면서 하늘의 광명이 열리는 체험을 하신 태상종도사님은 상제님 사업이 천명임을 아시고, 이후 전국 8도와 만주, 중국 등지를 주유하며 세상인심과 만고풍상을 체험하셨습니다.
태상종도사님은 24세 되시던 해 해방을 맞아 고향에 돌아오신 후 증산 상제님의 진리를 선포하며, 전국 각지에 신도 수 십만을 규합하였습니다.
우주와 인간에 대한 상제님 가르침의 핵심을 누구나 알기 쉽게‘우주 1년 도표’로 밝히신 것도 이 무렵입니다.
1974~1975년 태상종도사님은 안경전 종도사님과 함께,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로 정해 놓은 태전(대전)에서 제3변 도운을 중흥시켜 후천선경을 향한 새 역사를 개척하는 데 평생을 바치시고 임진년(2012)에 어천御天하셨습니다.
안경전 종도사님
안경전 종도사님은 증산도의 큰 스승이요 지도자로서 안운산安雲山태상종도사님을 모시고 증산도 종단宗團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오셨습니다.
상제님과 태모님 말씀을 집대성한 인류의 새 문화 원전인『도전道典』을 편찬하시고, 상생문화연구소를 설립해 『도전』을 6개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주관하셨습니다.
그리고 태상종도사님과 함께 한韓문화 중심 채널 STB 상생방송국을 개국(2007년)하여 증산도 문화를 대중화하고 세계화하는 초석을 마련하셨습니다.
또한, 30년 간 연구와 현지답사를 거쳐『환단고기』역주본을 발간하여, 인류 문화의 원형을 되찾고 한민족 9천 년 역사의 국통맥을 바로 세우는 역사 광복 운동을 주도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