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주어진 일상생활의 영역에 모든 정열을 투자하며, 큰 갈등 없이 현실의 여러 문제에 순응해가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무슨 일을 하건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한시도 마음 밖으로 밀어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전자는 후자를 '덜 자랐다'고 하고, 후자는 전자를 한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의 근원과 존재의미에 대해 묻고 있다. 그러나 쉽게 대답을 찾을 수 없어 묻기를 포기한 척 살아가는 것뿐이다. 각자의 삶에는 피할 수 없는 슬픔과 좌절의 경험이 따른다. 아무리 성공한 듯 보이는 사람도, 유복해 보이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이나 소망의 좌절을 겪지 않고 살아갈 방법은 없는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이는 답답한 마음에 우리는 쉽게 체념하고 상처받으며 서로를 아프게 하고 절망해 가는 것이다. 누가 이 문제를 풀어줄 것인가? 어디에서 마음의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얻을 것인가?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일까? 복잡한 생각 말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 된다고들 말하지만 그것 또한 이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일생이 고작 70~80년이 한계이고, 그 후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 없이 '무'로 돌아간다면, 무슨 성실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영원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그 세월은 순간에 불과한데, 그 짧은 동안 즐기지 않고 언제 즐길 것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즐거움을 찾아 인생을 만끽해야 이치에 맞을 것이다. 기껏 노력한들 죽고 나면 끝인데 왜 사서 고생을 해야 하며, 아무리 남에게 피해를 주고 몹쓸 짓을 해도 죽고 나면 끝인데 뭘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우리에게 죽지 않는 영혼이 정말 있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더구나 그 영혼은 살았을 때의 자신의 삶에 따라 적절한 보상을 받기도 하고, 새로운 몸을 얻어 지상에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면‥. 자신의 참모습을 적극적으로 찾는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이론이고, 새롭고 낯선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부담스럽고 거부감을 느끼는 얘기가 될 수도 있다.
물질문명의 화려함과 풍요로움은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윤기있고 풍성하게 해주었지만, 한편 삶의 질과 의미를 월수입과 자동차, 살고 있는 집의 크기로 오해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알게 모르게 우리를 유물론적인 사고로 몰아가고,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좋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한 무한경쟁의 피곤한 쳇바퀴 속에 우리를 잡아놓는 것이다. 이처럼 바쁜 생활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누가 깊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질문을 마음속 깊이 접어둔 채, 눈 앞의 하루하루를 살기에도 벅차다. 그러나 곳곳에서 부딪히는 좌절과 슬픔과 부조리와 억울함들은 순간순간 우리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 질문들을 끄집어내게 만든다. '왜 최선을 다하고도 실패하는가?' '그토록 착한 사람이 왜 그런 비참한 일을 당하는가?' '왜 나만 이런 몹쓸 병에 걸려 신음하는가‥?' 안타까운 이별과 비참한 상실 등 고통의 가짓수는 끝이 없다. 그리고 그 질문들의 끝에는 최후의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내 고통의 이유와 의미는 무엇인가?' 누구도 정답을 주지 않는 이런 질문들은 우리를 답답하게 만든다. 그래서 괴로워하며 '인생의 의미는 알수 없다', '인생은 싸움터고 원하는 것을 쟁취해야 한다', '삶은 무의미하다' 하는 말들을 내뱉으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이 책에서 여러분이 읽게 될 이야기는 그 신비로운 만남과 그 만남으로부터 전해지는 많은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대화 내용은 모두 녹음테이프 그대로이며, 일부 물의를 일으킬 만한 충격적인 내용들과 극히 개인적인 일들은 접어두었다. 환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이름과 배경도 약간 변형되었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내용은 사실이며, 단 한 가지도 덧붙인 것이 없음을 내 모든 것을 걸고 단언할 수 있다.
죽음의 실체는 무엇이고 환생이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고대로부터 많은 종교들은 영혼의 윤회와 환생에 대해 가르쳐왔다. 불교와 힌두교는 물론 초기의 유태교에서도 윤회는 사실로 인정되었고, 기독교에도 윤회의 가르침이 있었지만 서기 335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의 어머니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신약성경에 실려 있던 윤회에 대한 가르침을 삭제하였고, 서기 553년의 제2차 종교공의회에서 윤회의 이론을 이단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은 민중을 좀 더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정치적인 음모였다고 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와 바빌론, 아시리아, 그리스에서도 윤회사상이 발견된다. 윤회사상이란 인간의 영혼은 오랜 세월동안 여러 모습의 다양한 생을 거치며 성숙되어 마침내 슬픔과 미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윤회사상에서는, 죽음은 영혼의 세계에 이르는 하나의 통로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며, 인간은 죽음을 이해해야만 삶도 이해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윤회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힘은 각자의 영혼이 살아 있을 때 행한 행위들인 업(業, karma)의 법칙이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영혼의 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수많은 모순과 불의한 모습들을 이해하고 운명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논리적이고 타당한 이론이기 때문에, 독선적 철학과 종교에 질린 많은 서양의 지성인들도 이제는 진지하게 윤회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이 방면의 연구와 실제 환생 사례들에 대한 조사도 서양에서 더 열성적이고 성의있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면이란 무엇인가? '최면상태'란 말의 뜻은 '한 가지 생각이나 현상에 집중함으로써 피암시성이 증가된 상태'를 말한다. 간단히 말해 표면의식을 잠시 접어두고 우리의 잠재의식과 직접 교통하는 상태이다.
18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영국에서는 마취를 하지 않는 대신 최면술을 이용한 큰 수술들의 많은 예가 보고되었다. 1800년대 말에는 영국의 의사인 제임스 브레이드James Braid가 최면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며 현재의 용어인 '최면술Hypnosis'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현재 최면술에 대한 연구는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미 1958년에 최면술은 미국의학협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의료 기술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앞으로 최면이 의료 전반에 걸쳐 커다란 공헌을 하리라는 것은, 최근의 의학 학술잡지들의 논문과 기사에서 최면을 이용한 치료와 연구 결과들이 급증하고 있음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의학은 끝도 한계도 없는 응용과학의 한 분야이다. 현재의 알려진 이론과 가설로 모든 환자를 설명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전문성과 이론이 도전을 받을 때, 아무리 애써도 알 수 없을 때, 우리 의사들은 과연 마음을 열고 새로운 영역을 탐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보고되는 현상을 착각이나 환각이라고 매도하기 전에 그 현상을 직접 확인하고 평가를 내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의무임에도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나와 한 환자가 같이 겪고 있는 경이로운 체험과 교훈에 대한 것이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 속에서 평소 궁금하게 생각했던 문제들에 대한 많은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신기하고 믿기 어려운 내용들이지만 모두가 사실이며,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나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생활에 큰 변화가 생기리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