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권력 실세 민영환 자결로 과오 씻고 충절 남기다
기사입력 2009-04-15 00:58 |최종수정 2009-04-15 01:07
[중앙일보]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조선은 허울만 남은 나라가 되었다. 같은 달 30일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은 왕조의 몰락에 책임지고 자결로 속죄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는 읽는 이의 가슴속 깊이 큰 울림을 남긴다. “슬프다. 국가와 백성의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이 생존경쟁 가운데서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영환은 죽음으로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다행히 우리 동포형제들이 천만 배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몸도 저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아,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몸은 죽어도 정신은 남는 법. 이듬해 봄 피 묻은 옷을 간직한 방에서 푸른 대나무가 돋아났다. 혈죽(血竹)을 피워낸 그의 충심은 후대 사람들의 뇌리 깊숙이 나라를 위해 죽은 애국자로 아로새겨졌다. 그러나 민비를 고모로 둔 그는 17세에 벼슬길에 올라 21세에 이미 당상관이 될 만큼 권력의 단맛을 충분히 맛본 권력의 실세였다. 1890년대에 그는 민영준·민영달·민영소와 함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당시 정계를 쥐락펴락한 민씨 4인방 중 한 명이었다.
조선조 말엽에 꼬리를 물고 등장한 세도정권의 공통점은 나라보다 가문의 이익을 앞세우는 데 있었다. 민씨 정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갑신정변 이후 열강 사이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 바깥에서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던 이른바 '태평십년(1885~1894)'이 찾아왔었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때 민씨 척족의 부패는 동학 농민봉기로 곪아 터졌다. 동도대장 전봉준은 민영환을 “관직과 작위를 팔아먹는 것을 일삼던 자”로 손가락질한다. 그는 명실상부한 민씨 척족정권의 실세로 왕조의 몰락을 이끈 책임을 면키 어려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후대 사람들이 그를 충의지사(忠義之士)로 기려 잘잘못을 따지려 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자기 정권의 과오에 죽음으로 속죄한,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책임 정치가이기 때문일 터이다.
'패밀리'라는 또 하나의 척족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오늘. 그의 반궁자성(反躬自省)하는 삶은 한 세기를 건너뛰어 정치인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정신을 소스라치게 일깨운다.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때 근위병들 앞에서 러시아 군복 차림으로 긴 칼 차고 미소 짓는 그(사진)가 무척 그립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민영환의 충의에 혈죽을 내리심
하루는 한 성도가 여쭈기를 “민영환이 나라를 위하여 자결하였는데
벽혈(碧血)이 나오고 그 자리에서 청죽(靑竹)이 생겨났다 하니 이는 어떤 연고입니까?” 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민영환이 나라를 위하여 의롭게 죽었으므로 내가 혈죽을 내려 그의 충의(忠義)를 표창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5편 140장)
140:2 청죽. 혈죽(血竹) 또는 절죽(節竹)이라 불린다. 원로 역사학자 최태영 박사는 “당시 혈죽은 잎사귀가 45개 있었으며 이 숫자는 민 충정공이 순절할 때의 나이와 같은 수여서 더욱 신비스러웠다.” 하였다.
< 고려대 박물관에 보관중인 혈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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