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신라를 수호한 미추왕 |
| 신명계(神明界)와 맞닿아 있는 동서고금의 실화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의 이면에 작용하는 신도법칙(神道法則)을 살펴봅니다. 상제님께서 박을 가운데에 놓고 주문을 외우시니, 한 박에서는 투구를 쓰고 기치창검을 한 아주 작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나오고, 또 다른 박에서는 무장된 말들이 고자리처럼 꼬작꼬작 나오더라. (道典 5:367:10∼12) 상제님의 이 천지공사 말씀을 보면 신명조화가 얼마나 무궁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말씀을 연상케 하는 설화가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편 ‘미추왕과 죽엽군’조에 나온다. 또한 신라의 미추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킨 호국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야기에는 그러한 면모도 많이 부각되어 있다. 미추왕에 얽힌 두 가지 이야기를 쉽게 풀어서 소개한다(『삼국사기』에도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죽엽군을 동원하여 나라를 지킨 미추왕 신라 제14대 유례왕 14년(A.D 297) 때의 일이다. 일개 소국에 불과했던 이서국(伊西國)1)의 군사들이 신라를 쳐들어왔다. 신라는 대군을 동원하여 방어에 나섰으나 정세는 점점 불리해졌다. 금성(金城)2)이 함락되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때, 수를 셀 수 없는 이상한 군대가 나타나 신라군에 합세했다. 그들의 공격에 놀란 이서국 군사들은 지리멸렬하게 흩어졌고, 위기에 빠졌던 신라군은 마침내 적군을 격파했다. 형형한 눈빛을 한 그들은 신라군과 별로 다를 바는 없었지만 특이하게도 양 귓등에 댓잎을 꽂고 있었다. 오래 전에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이 귓등에 댓잎을 꽂고 생시와 똑같이 싸우더라고 노인들이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엽군(竹葉軍)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죽은 선조들이 나타나서 신라를 도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미추왕릉에 이르러 보니 능 앞에 대나무 이파리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선왕(先王)인 미추왕이 망자들로 조직된 신병(神兵)을 동원하여 신라를 수호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 후부터는 이 능을 죽현릉(竹現陵, 댓잎 꽂은 병사들이 나타난 능)이라 부르며 더욱 숭앙했다. 〈반지의 제왕-제3편 왕의 귀환〉을 보면, 반지원정대의 아라곤이 선대(先代)의 군사들의 혼령을 동원, 마침내 전세를 역전시키는 통쾌한 장면이 나온다. 화난 김유신을 설득하는 미추왕 세월이 흘러 제36대 혜공왕 15년(A.D 779) 때였다. 그해 4월 어느 날, 김유신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그 회오리바람 속에서 금빛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장수가 홀연히 나타났다. 바로 김유신의 혼령이었다. 그 뒤로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명 가량의 군사가 따랐다. 김유신과 군사들은 회오리바람과 함께 눈 깜빡할 사이에 죽현릉으로 빨려들 듯 들어갔다. 잠시 후, 능 속에서는 땅이 진동하는 소리도 나고 울음소리와 함께 하소연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신은 평생 어지러운 나라를 위해 싸웠으며 삼국을 통일시킨 공훈을 이루었습니다. 지금은 죽어 혼백이 되어 있어도 나라를 굽어 돌보아, 재앙을 물리치고 환난을 구제하려는 마음은 잠시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3)이 죄없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는 지금의 군신들이 신의 공로를 망각한 처사이옵니다. 이제 신은 차라리 이곳을 떠나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다시는 이 나라를 위해 힘쓰지 않으렵니다. 바라옵건대 부디 이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소연이 끝나자 미추왕의 혼령이 대답했다. “나와 그대가 이 나라를 돌보지 않는다면 저 많은 백성들은 어찌 되겠소? 그대는 노여움을 풀고 전과 다름없이 다시 힘써 주시오.” 김유신의 혼백은 세 번을 청했으나 미추왕의 혼백은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았다. 잠시 후,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더니 김유신과 그를 따르는 군사들이 죽현릉을 나와 김유신의 능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소문은 순식간에 온 나라에 퍼져 혜공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혜공왕은 두려운 마음에 대신(大臣) 김경신을 보내 김유신 묘에 제사를 올리며 사과하게 했다. 그리고 김유신이 생전에 세운 경주의 취선사에 공덕보전(功德寶田)4) 30결을 내리고 김유신의 명복을 빌게 했다. 미추왕(味鄒王, ?~284) 신라 제13대 임금(재위262∼284). 김알지의 6대손으로 김씨로서는 처음 왕이 되었다. 미추왕은 나라를 순회하면서 외롭고 가난한 노인들을 보살피기도 하고, 농사철에는 일체의 부역을 금지시키는 등 백성들을 위해 힘썼다고 한다. 사진은 미추왕릉(홍륜사 동쪽에 위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