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31대 공민왕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원나라를 배척하고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를 쳐 오로산성을 점령하는 등 기세 찬 개혁가였던 공민왕은 부인인 노국공주가 죽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남색에 빠져 결국 자신이 총애하던 남자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그런 공민왕에게 또 다른 직업이 있었다. 그것은 화가.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천산대렵도'를 보고 있노라면 왜 공민왕을 두고 고려를 대표하는 천재화가라 칭송하는지 알 수 있다. 말을 타고 너른 벌판을 달리는 용맹한 사냥꾼을 경쾌한 필치로 그려낸 '천산대렵도'는 화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공민왕의 신기(神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에게 노국공주는 인생의 전부였다. 원나라 황족의 딸이었던 노국공주는 원의 세력을 몰아내려는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적극 동참해 이를 앞장서 실천해 나갔다. 부군과 부군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친 노국공주를 향한 공민왕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오랜 기간 가슴앓이하던 노국공주가 어렵게 임신을 했지만 난산으로 세상을 뜨자 공민왕은 세상을 잃은 듯 크게 낙담해 손수 노국공주의 진영 '노국대장공주진'을 그린 뒤, 벽에 걸어놓고 밤낮으로 바라보며 울었다. 죽은 노국공주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공민왕은 진영을 모시는 화려한 영전을 짓고 혼제를 지내는 등 오로지 노국공주를 위한 불사에만 빠져 살다 고려의 멸망까지 재촉하고 만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노국대장공주진'. 그러나 조선시대 연산군이 이 그림을 즐겨 바라봤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최소한 이 시기까진 존재했던 모양이다. 조선을 희롱했던 연산군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이 그림을 바라봤을까.
염사 결과, 화려하게 장식된 방에서 내시를 시켜 그림을 들게 한 뒤 비스듬히 누워 이를 감상하는 연산군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에게 노국공주는 모성의 판타지이며 동시에 가질 수 없는 아름다운 미녀였다. 손만 뻗으면 모두 가질 수 있는 현재의 여자를 넘어,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과거의 여자인 노국공주를 흠모하게 된 것이다.
염사로 본 공민왕의 역작 '노국대장공주진'은 가히 한국 역사상 최고의 미인도라 해도 손색없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전형적인 몽골미인이었던 노국공주는 작은 얼굴에 쌍꺼풀이 없는 날카로운 눈, 짙은 반달형 눈썹 등 중성적인 이목구비를 갖고 있으며 차가운 매화처럼 냉철하면서도 전체적으로 관능적인 분위기를 발산하는 강한 매력의 여성이었다. 오죽하면 조선 천지 모든 여자를 침실로 불러들였다는 연산군이 그림 속 그녀에게 푹 빠졌겠는가.
미인이긴 하나 미소년 스타일에 가까웠던 노국공주는 중성적인 매력이 돋보였다. 이런 점 때문에 공민왕은 훗날 남색에 빠져 암살당하게 되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노국공주의 진영이 어떤 경로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남아있었다면 한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미인도 중 하나로 세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노국공주의 진영을 염사로 바라보면서 그녀를 사랑했던 두 남자, 공민왕과 연산군의 마음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