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석 선생의 예언 :2010-2013년부터 임신 불능의 천재지변 발생!
‘우주변화(宇宙變化) 원리(原理)’ 책의 저자 한동석(韓東錫) 선생은 “2010-2013년부터는 여자가 임신하기 어려울 것이다!” 라고 전망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토에도 변화가 생긴다고 보았다. 한반도 남동쪽이 물에 잠기는 반면, 서쪽 대륙이 융기하여 크게 늘어난다고 예언하였다. 2010-2013년부터 후천(後天) 개벽(開闢)의 조짐이 서서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딴따라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말 또한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오행(五行)으로 보면 북한은 북방수(北方水)에 해당하고, 남한은 남방화(南方火)에 해당한다. 북한은 물이고, 남한은 불이다. 그런데, 소련의 상징이 백곰이다. 백곰은 차가운 얼음물에서 사는 동물이니 소련 역시 물이다. 중국은 상징동물이 용이다. 용은 물에서 노는 동물이어서 중국 역시 물로 본다. 북한도 물인데, 여기에 소련의 물과 중국의 물이 합해지니, 홍수가 나서 남쪽으로 넘쳐 내려온 현상이 바로 '6.25 전쟁'이다. 대전은 들판이라서 그 홍수가 그냥 통과하고, 전주. 광주도 역시 마찬가지로 통과하였다. 그러나, 대구는 큰 언덕이어서 물이 내려가다 막혔다. 울산 마산은 모두 산이어서 물이 넘어가지 못했다. 부산은 불가마이니 물을 불로 막을 수 있었다. 경상도가 6·25의 피해를 덜 본 이유는 이 때문이다. (한동석)
"내가 독일 유학을 갈 때가 1959년도인데, 이승만 정권 때죠. 독일로 출발하기 전에 나에게 형님(한동석)이 그랬어요. '이기붕 집안은 총에 맞아 죽는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는 결국 내려오고 마는데, 난리 나서 갈팡질팡할 것이다. 그 다음에 1년 정도 민주정부가 들어선다. 그 다음에는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 독일에 있으면서 한국 정세를 보니, 형님 말한 것이 전부 맞는 거예요. 그 때부터 저는 형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귀를 쫑긋하고 들었죠. 1963년도에 귀국해 보니, 박정회 정권이 들어서 있더군요. 박정희 정권은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형님에게 물었더니, 육영수 여사를 포함해서 부부간에 객사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통령이 어떻게 객사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으니, '누군가가 장난하지 않겠니' 하더군요. 총 맞아 죽을 수 있다고 그래요. (한봉흠 고려대 교수).
"형님 지론에 의하면 대통령은 목(木). 화(火) 기운이 되는 것이 국가에 이롭다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목(木). 화(火)는 밖으로 분출하는 형이어서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국운이 밖으로 팽창한다는 것이죠. 반대로, 금(金). 수(水)는 수렴형이어서 안으로 저장하고 움츠러드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러므로 내무부 장관이나 중앙정보부장 같은자리는 금(金). 수(水)를 많이 가진 인물을 배치해야 하고, 상공부나 생산하는 분야는 목(木). 화(火)를 많이 가진 인물을 배치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금융 분야는 토기(土氣)를 많이 가진 사람이 적당하다는 거죠. 금융은 양심적이고 공정해야 할 것 아닙니까. 토(土)는 중립이어서 공정하죠. 이게 오행에 맞춘 인재 배치법이자 용병술이죠. 국가적인 차원의 인재 관리는 오행(五行)을 참고해야 한다는 게 형님 생각이었습니다. (한봉흠 고려대 교수).
'박대통령이 죽고 난 후에 정치적 혼란기가 다시 한번 오게 되는데, 이 때에도 1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정치형세가 서너 번 바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정부 상태를 거친다는 거였죠. 그 다음에 군사독재가 한번 더 온다는 겁니다. 군사독재 다음에는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어정쩡한 인물이 정권을 잡은 다음 김(金)씨를 지닌 사람들이 한 10년 정도 정권을 잡는다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니 양김(兩金. 김영삼. 김대중) 씨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다음 정권은 목기(木氣). 화기(火氣)를 지닌 사람 (盧. 창자루. 화로)이다. 목기와 화기를 지닌 사람이 정권을 잡아야 피를 안 흘린다. 그리고, 그 이 후에 통일이 된다고 했죠. 남북 통일이 되려고 하면, 남쪽에 전쟁같은 약간의 혼란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봉흠 고려대 교수).
한동석 선생은 1963년 1월부터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생일, 생시인 6월8일(음력) 인시(寅時)에 닥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 생일, 생시를 넘긴다면 자신이 더 살 수 있을 것이나 아무래도 그것을 넘기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는 스스로 본인의 이러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하여 계룡산으로 내려가 보기도 하였으나 결국 자신의 예견대로 6월8일 축시에 운명하였다. 2시간 정도만 견디면 인시를 넘길 수 있었으나 자신의 생시를 코앞에 두고 그만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임종한 것이다. 그리고, 생전에 본인이 죽고 난 뒤, 온 식구가 거지가 되어 거리에 나 앉을 것이라며 대성통곡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본인의 임종 후 가세가 기울어 인사l동 집을 비롯한 가산을 팔고 가족이 흩어지는 시련을 겪었다.
한동석 선생은 1911년 음력 6월 5일 인시寅時 함경남도 영광군 용동리에서 청주한씨 예빈윤공파 22세손으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20대 후반까지는 장사를 하였다. 32세 되던 1942년에 부인이 폐병으로 죽고 난 뒤, 본격적으로 한의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부인이 죽기 전에 이제마 선생의 이전제자(二傳弟子)인 김흥제 선생에게 치료를 받았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흥제 선생 밑에서 한의학을 배웠다고 한다. 6.25 전쟁시 1952년 부산 영도에서 진료하는 틈을 내서 동양의학 전문학원에 강사로 출강을 하였고, 1953년에는 부산 영도에서 제2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응시하여 면허를 취득한 후 정식으로 개원하여 인계한의원을 운영하였다.
1956년 서울로 올라와서 인사동 사거리에 한동석 한의원을 개원하였으며, 이후 <역학원론>의 저자이며, 주역에 대해서 깊이 연구한 한 장경 선생으로부터 주역을 배웠다. 선생은 계룡산 국사봉 (정역의 김일부 대성사께서 도통하신 곳)을 출입하면서 주역과 정역 등을 공부하였다. 우리나라의 국사가 배출된다는 국사봉 밑에 자리잡은 향적산방은 좌우로 청룡·백호가 바위 맥으로 내려와 야무지게 감싸고 있고, 정면으로 보이는 안산(案山)은 두부처럼 평평한 토체(土體) 안산이다. 1960년을 전후하여 선생은 <황제내경> '운기편', <주역>, <본초> 등에 관한 내용을 한의사, 한의과 대학생 등에게 한의원 2층에서 강의를 시작하여 몇 년간 지속하였으며, 경희대학교 한의과 대학의 전신인 동양의약대학에서 시간강사, 이후 전임강사로 출강하였다. 1960년대 전반기부터 <우주변화의 원리>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여름만 되면 계룡산에 내려와 목욕재계를 하며 원고를 수정하여 정리하였다고 한다.
한동석 선생은 한의사이면서도 '앞일을 귀신 같이 아는 도인(道人)'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동석 선생이 전념한 수도修道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방법은 독경讀經이었다. 그는 황제내경 운기편을 일만 번 가까이 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3,000독을 목표로 하였으나, 3,000독을 해도 신통찮다고 여기고 다시 6,000독 9,000독에 이르렀다고 한다. 9,000독에 가니 약간 보이더라고 술회하였다. 마지막 1만 독을 채우면서 활연관통(豁然貫通)했던 것 같다.
한동석 선생이 필생의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경전(經典)은 '황제내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책을 보면 이해가 되는데, 황제내경만큼은 쉽게 이해되지 않으니 무식하게 막고 품는 방법을 택한 셈이다. 사실 무식한 방법이 정공법이다. 무조건 외우는 방법이 막고 품는 방법이다. 변화구나 체인지업 말고 무조건 강속구를 던지는 수밖에 없다. 꿈에서도 경전을 외울 정도면 도통한다고 한다. 불가(佛家)나 도가(道家)나 유가(儒家)의 공부 방법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온 말이 ‘사지사지 귀신통지’ (思之思之 鬼神通之)라는 말이다. ‘밤낮으로 생각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면 활연(豁然)하게 깨닫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몽중일여(夢中一如, 꿈에서도 낮에 생각한 마음과 같음)가 바로 이 경지이다.
조선 후기의 유가의 도인이었던 이서구(李書九.1754~1825)가 ‘서경’(書經) 서문(序文)을 9,000독 해서 이름을 ‘서구’(書九)라고 지었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황진이 묘를 지나면서 “잔 잡아 권할 사람 없으니 이를 슬퍼 하노라”고 절창을 읊었던 임백호(林白湖. 16세기)가 속리산 정상의 암자에서 ‘중용’을 5,000독 하고 나서 한 경지 보았다는 이야기는 모두 같은 맥락에 속한다. 결론적으로 한동석이 보여주었던 파워의 진원지는 ‘황제내경’ 1만독이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