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命理學
계룡산파의 秘訣과 탄허 스님이 남긴 일화들
탄허는 불교의 고승이지만 주역을 비롯한 역술과 풍수도참에도 깊은 식견을 가진, 계룡산파 줄기의 도맥을 이어받은 독특한 스님이었다.
후천개벽 주장한 ‘正易’의 김일부 선생
숙신비결은 탄허가 계룡산 학하리의 자광사에 머무르던 시절 입수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가 1970년대 초반이었다. 학하리는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일명 추성낙지(樞星落地)의 명당으로 불렸다. 추성은 중심이 되는 별이니 북극성을 가리킨다. 북극성이 떨어진 자리니 그 의미가 심중하다. 계룡산 전체가 명당이 수두룩한 곳이지만 탄허는 그중에서도 학하리를 아주 좋아하였다. 자광사 터는 원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공부하던 집성사(集成社) 자리로, 우암이 여기에 주자(朱子) 영정 모셔놓고 공부하던 곳이다. 지금도 우암이 심은 소나무가 남아 있어 옛날의 자취를 전하고 있다.
탄허가 머무르던 1970년대 초반의 자광사에는 괴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 괴물 가운데 한사람이 해운(海雲)이었다. 해운은 탄허보다 대략 7~8년 연상쯤의 나이였으니 지금 살아 있다면 100세 정도 되었지 않나 싶다. 그는 한일합방이 되자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천지를 방랑하였다. 태산을 비롯한 중국의 명산들에 올라가 산세를 굽어보고, 대천을 방랑하면서 수많은 기인들과 만났다. 1920~30년대 중국에서는 독자적인 무력을 보유한 군벌들이 이곳 저곳에서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 군벌들의 우두머리들과 교류하면서 관상도 보아주고 사주도 봐줄 만큼 중국말에도 능통하였다.
그는 1년 열두달 항상 시커먼 중국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누가 욕하더라도 한번도 성질을 내는 법이 없을 정도로 그릇이 컸던 인물이었다. 기분 나빠도 ‘허-허’ 웃고 나면 끝이었다. 배고프면 아무것이나 먹고 잠이 오면 잠자리를 따지지 않고 잘 수 있는 낭인과의 전형이었다. 산에 가면 도인이요, 세속에 내려오면 영락없는 시정잡배였다. 잡배적인 기질은 그가 접촉한 여자만 해도 800명에 달했다는 고백에서도 나타난다. 미국의 소문난 플레이보이 클린턴도 200명 선에 그쳤다고 하니 해운에게 비교하면 족탈불급이다.
사나이 대장부가 1,000명을 채워야 하는데, 그것을 못 채워 좀 아쉽다고 한탄할 만큼 해운은 무애(無碍)의 기질을 지녔던 괴물이었다. 승속에 전혀 걸림이 없었다고나 할까. 그는 중국 일대를 방랑하는 과정에서 주역과 관상, 그리고 수많은 비결을 입수할 수 있었다. 걸림이 없는 성품에다 관상과 주역에도 능통했던 만큼 누구를 만나도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한시(漢詩)에도 대가의 경지에 들어 있었다. 박금규(원광대·한문교육과) 교수가 탄허 스님을 시봉하던 시절이었던 1968년 서울 대원암에서 해운을 만났을 때, 해운이 즉석에서 지어준 칠언절구는 다음과 같다.
水裏月何天上月(물 속에 있는 달이 어찌 천상의 달이겠는가)
鏡中人不案前人(거울 속에 비치는 사람은 책상 앞의 사람이 아니듯)
靜觀形影相依處(고요히 관찰하면 형상과 그림자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無是假時無是眞(가짜가 없으면 진짜도 또한 없는 법이다)
즉석에서 ‘무시가시무시진’(無是假時無是眞)이라는 절창을 읊을 정도의 사상적 깊이와 문장을 지녔던 해운. 그런 해운이었기에 당대의 고승이자 석학으로 알려진 탄허에게도 천연덕스럽게 반말을 사용하였다. 스님이라고 하지 않고 신도가 옆에서 보든 말든 ‘어이, 탄허!’가 호칭이었다. 한마디로 탄허는 해운의 밥이었다. 그런데도 탄허는 해운을 끔찍하게 좋아하면서 돌봐주었다. 필자가 추측하기로는 숙신비결은 바로 해운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옛 고구려 땅인 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비결을 접하였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숙신비결을 입수하였던 것 같다. 숙신비결은 탄허에게 넘어갔고, 탄허의 제자들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셈이다.
1960년대에서 1970년에 걸쳐 계룡산파가 운집했던 자광사. 그 자광사에서 이루어졌던 해운과 탄허의 만남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숙신비결보다 ‘정역’(正易)이다. 해운은 ‘정역’에도 전문가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탄허가 해운에게 매료된 부분은 아마도 이 대목이었지 않나 싶다. 구한말 김일부(金一夫) 선생이 저술한 ‘정역’은 기존의 주역에 하도낙서·음양오행·십간십이지·고천문학·사서삼경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책이라서 난해하기 그지없다. 이 분야를 전부 알아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이는 마치 김일부라는 천재가 평생 공부한 것을 요약한 박사논문과도 같아서 범상한 IQ 가지고는 접근이 안되는 학문이다.
‘정역’의 요점을 간단하게 말한다면 지축이 바뀐다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어마어마한 거대담론이 후천개벽설이다. 한·중·일 3국 가운데 후천개벽을 주장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일본·중국에서는 후천개벽이라는 용어가 아예 없다. 그만큼 독창적인 사상이자 예언이 바로 후천개벽설인데, 남들이 이야기 하지 않는 독창적인 예언인 만큼 위험부담은 따른다. 일부 선생이 주장한 후천개벽의 초점은 지축이 바뀐다는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현재 1년 365일이 360일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지구상의 총체적인 변화가 뒤따른다.
그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일본이 물속으로 점점 침몰한다는 내용이다. 지축이 바뀌면 북극의 빙하가 녹아 일본이 가라앉고 동해안도 강릉 일대는 물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반대로 서해안은 점점 융기되어 수천리의 바다가 육지로 변한다고 전망하였다. 탄허 스님은 특히 일본이 물에 잠긴다는 예언을 여러번 강조하였다.
탄허 스님이 밝혀 놓은 그 예언이 ‘주역선해’(周易禪解·교림출판사, 1982년) 3권의 마지막 부분인 427쪽에 나온다.
‘대덕(大德)이 지(地)를 종(從)함이여 지(地)가 좆아 말하도다.(水潮南天하고 水汐北地 등을 의미함)
천일(天一)의 임수(壬水)가 만번 꺾어 반드시 동으로 가도다(극동인 일본을 의미함)
지일(地一)의 자수(子水·陰水)가 만번 꺾어 돌아가도다(북극의 빙하가 필경 일본에 가서 그침을 의미함).’
이 예언의 요점은 북극에서 빙하가 녹아 내리면 해수면이 상승하고, 해수면이 상승하면 일본은 물속에 잠긴다는 내용이다. 탄허의 이 예언은 1970~80년대 신문·잡지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여러번 소개된 바 있는 유명한 예언이기도 하다. 이 예언의 원리적 근거는 일부 선생의 ‘정역’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정역’의 원문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水潮南天 水汐北地(물이 남쪽 하늘에 모여들고, 물이 북쪽 땅에서 빠짐일세)
天一壬水兮萬折必東(하늘의 임수는 만번 꺾여도 반드시 동으로 가고)
地一子水兮萬折于歸(땅의 자수는 만번 꺾어도 임수 따라 가는구나).’
김일부는 이미 1,880년대 중반 계룡산 국사봉 토굴에서 ‘정역’을 완성하면서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 일본이 망한다’는 예언을 하였던 것이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압박에 힘겨워하던 조선의 수많은 도꾼들은 그 희망의 메시지를 찾아 계룡산 국사봉으로 모여들었고, 아마 소시적의 해운도 그 도꾼들과 섞여 계룡산을 순례하면서 정역의 메시지를 접했던 것 같다.
피끓는 젊음을 가지고 있던 해운은 도저히 국내에서만 살 수 없었다. 광대한 천하가 열려 있는 중국 대륙과 만주 일대로 정처없는 방랑자의 인생을 살았고, 그 결과 ‘숙신비결’과 같은 비결의 세계를 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전 지구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본이 침몰한다고 하는 정역의 세계를 탄허에게 전달해 준 인물은 해운이라는 계룡산파의 이름 없는 술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근래에 외신을 통해 들어오는 뉴스를 보면 한반도 크기만한 북극의 빙하가 녹고 있고, 히말라야의 빙하도 급속도로 녹아내려 네팔과 티베트 같은 히말라야 주변 국가들이 홍수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한다. 일본이 절대로 침몰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이렇게 놓고 보면 19세기 후반 계룡산 국사봉의 허름한 토굴에 앉아 북극의 빙하가 녹을 것이라고 예언한 김일부와, 방랑자 해운, 그리고 이를 국민에게 고한 탄허는 같은 노선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들은 모두 국운융창이라는 계룡산파의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탄허는 일본 침몰 외에도 여러 가지 예언을 하였다.
굵직굵직한 예언을 간추리면 ‘월남전에서 미국 망한다’(패전한다) ‘울진·삼척에 공비가 침투한다’ ‘박정희 죽는다’ ‘전두환 죽는다’ 등이었다. 이 가운데 ‘전두환 죽는다’는 예언은 탄허가 1980년대 초반 텔레비전을 보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탄허가 보기에 당시 전두환에게는 신검살(神劍殺)이 내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옆의 제자들 보고 “전두환 죽게 된다”는 말을 여러번 하였다. 신검살이란 칼에 맞아 죽는다는 살이다.
그러나 탄허가 전두환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어서 만나고 온 뒤에는 “직접 얼굴을 보니 신검살이 안보였다”면서 “그거 참 이상하다”며 제자들에게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전한다. 후에 아웅산 폭발 사건으로 거의 죽을 뻔했다 살아났으니 탄허의 예언이 전혀 맞지 않은 것은 아니다. 탄허 예언이 맞지 않은 사례는 1980년대 초반 대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는다는 예언이었다. 그해에 태풍이 몰아쳐 남해안 일대에만 머무르다 돌아간 일이 있었다.
탄허가 자광사에 머무르던 1970년대 후반의 일화다. 자광사에는 당시 국회의원인 윤길중씨가 자주 출입하였다. 윤길중씨는 정치인이면서도 선비가 지녀야 할 필수 교양과목인 서예와 바둑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한시를 좋아해 탄허 스님과는 통하는 면이 많았다. 탄허 스님도 바둑 실력이 상당해서 아마 5~6단들과 두어 이기는 경우가 많을 정도 실력이라서, 아마바둑의 고수인 윤길중과는 특별히 친했다고 한다. 하루는 윤길중이 자광사에 오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그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장난기가 발동한 탄허는 지금 윤길중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알아맞추기 위해 엽전 3개를 던져 괘를 뽑아 보았다. 탄허는 그 괘를 보고 윤길중이 현재 어디쯤 오고 있다고 예측하였다. 옆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과연 그 예측이 맞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 보니 그 시간에 탄허가 말한 지점을 윤길중이 통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제자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탄허가 1960년대 후반 오대산 월정사에 주석하고 있을 때다. 당시 고려대학교 철학과 남녀 학생 열서너명이 하계 수련대회를 월정사에서 하였다. 수련대회가 끝나는 날 학생들은 곧바로 오대산을 내려가려고 서둘렀다. 이를 바라보던 탄허가 오늘은 산을 내려가지 말라고 학생들을 말렸다. 그러나 학생들은 여름이라 땀으로 범벅이 되고, 샤워시설도 없는 절에서 더 머무르기가 불편하였기 때문에 그 말을 듣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 학생들은 계곡을 내려가다 갑자기 호우를 만났다. 계곡물은 급류로 변해 있었다.
위험한 상황에서 서로 손을 부여잡고 계곡 물을 건너던 학생 중 하나가 미끄러지자 나머지 학생들도 따라서 미끄러졌다. 열서너명의 학생들 모두 급류에 떠내려가 희생당하였던 것이다. 그후 근처 동네 사람들은 사고 현장의 계곡 부근에는 접근하지 못하였다. 밤에 산을 올라가면 귀신들이 쑥덕거리는 소리와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남녀 귀신들이 바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밤에 출입을 못한 나머지 탄허 스님에게 어떻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결국 탄허 스님이 원혼들을 달래는 비문을 써주면서 그 현상은 사라졌다고 한다. 그 비문은 지금 월정사 옆에 남아 있다.
이런 귀신 이야기를 하면 황당하다고 할 사람도 많겠지만 귀신은 있다. 겪어보면 안다. 다음번에 귀신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겠지만 인간은 육체를 벗으면 모두 귀신이 된다. 귀신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집중 능력이 없는 범부가 죽으면 귀신급에 머무르고 말지만, 수도하던 도인이 죽으면 산신(山神)으로 업그레이드되거나 그 지역을 지키는 토지신(土地神)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 월드컵에 참여한 FIFA 랭킹 1위인 프랑스가 한국에 와서 죽을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할 수 있겠지만, 나는 한국의 토지신들이 프랑스 팀에 한방 먹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먹는 음식인 보신탕 가지고 프랑스 사람들이 그렇게 한국사람을 능멸하더니 한국에 와서 대가를 치른 것이다. 한국의 토지신들은 자존심이 강해 그냥 두지 않는다. ‘왜 남의 음식 가지고 야만인이네 어쩌네 하면서 사람 모욕을 주느냐. 그래 좋다. 너희들 한국에 왔으니 한방 먹어 보아라!’가 한국 산신들과 토지신들의 공통된 심정 아니었을까 하고 혼자 상상해 본다. 나는 요즘 보르도산 와인도 끊어 버렸다. 그 대신 고창에서 나오는 복분자술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