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고산리’서 신석기초기 한반도 최고 집단취락지 발굴…학계 관심 ‘비상’
둥근귀고리 1점·화살촉 등 교역물 추정유물도 다량…1만년전 이미 대외교류?
지금부터 약 1만년에서 1만2000년 전 신석기시대 초기, 제주 섬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한경면 고산리의 속칭 ‘한장밭’ 해안가에는 한반도 최고(最古)의 마을유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한반도 최초의 신석기 유적지가 제주 고산리다.
|
|
|
▲ 이번 시·발굴에서 원형주거지 10동, 수혈유구 80여기, 집석유구(추정 야외노지) 10여기, 다수의 주혈이 화살촉 등의 석기류 및 고산리식 토기와 동반 출토되는 점은 한반도 최고 신석기시대 주민집인 고산리유적의 정주취락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학술자료로 평가됐다. 25일 열린 고산리 선사유적 시.발굴 중간설명회. 뒤로 고산리 자구내포구 앞 당산봉이 보인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이 시대 고산리에 살던 선사인들은 절해고도의 섬에서 육지부나 혹은 대륙·일본 등과 문물교류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이 지역 시굴현장에서 옥 또는 규장암으로 추정되는 ‘결상이식’(둥근 귀고리) 1점이 발견됐기 때문으로, 고산리식 토기 양상이 한반도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고, 석촉 등 일부 석기류 재질도 제주에선 나지 않는 것들이 발굴됐기 때문이다.
# 고산리 신석기인들은 수렵 전문가…발굴유물 대부분 화살촉·석창 등 사냥도구
|
|
|
▲ 고산리 선사유적에 대한 이번 시.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결상이식(둥근귀고리)과 화살촉 등 석기류. 결상이식은 출토 당시 반파된 상태였고, 상부는 편평하며 하부는 원형을 띠고 있다. 재질은 현재 정확한 성분분석을 조사 중으로 옥 또는 규장암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토된 석기류는 대부분 화살촉과 찌르개 등 수렵용도의 석기류가 대다수다. ⓒ제주의소리 |
제주시와 (재)제주문화유산연구원(원장 김은석)은 25일 오후 고산리 선사유적(사적 412호)에서 실시한 1단계 시·발굴조사 중간보고 및 1차 자문위원회의에서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한 제주에서 이미 약 1만 년 전인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바다 건너 육지부와 문물교류를 벌였을 가능성과, 이 시기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유적으로서 매우 중요한 학술자료로 평가했다.
신석기시대 고산리 선사인들은 해안가에 마을을 이루고, 주로 수렵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가 섬이 된 이후 최초의 원주민들이 그들이다. 이보다 앞서 제주에 사람이 살았던 최초의 흔적은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동굴에서 발견된 석기류와 갈색곰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약 4만년전 중기구석기 시대지만, 이 시기 제주는 섬이 아니라 중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구주 지역과 육지로 연결된 빙하기였기에 현재까지 확인된 제주도가 섬이 된 이후 최초의 원주민은 고산리 선사인인 셈이다.
고산리 선사유적은 지난 1987년 고산리 주민(좌정인 씨)이 타제석창과 긁개 등을 발견한 후 제주대학교박물관에 신고하면서 세상에 그 모습을 처음 드러낸 곳이다.이를 계기로 1991년과 1992년 지표조사를 통해 자구내 포구 하천변을 따라 수월봉에 이르는 신석기시대 유물산포지를 확인하고 융기문토기와 찌르개·타제석기·석촉 등을 수거했다.
이후 1994년 ‘신창-무릉’간 해안도로 건설 과정에서 일부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1997년과 1998년 다시 고산리유물산포지 1지구에서 집중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출토된 유물은 고산리식 토기와 석촉을 포함한 각종 성형석기·폐기석재들이 대부분으로 1991년 지표조사에서 1998년 시·발굴 조사에 이르기까지 석기 9만9000여점, 토기조각 1000여점 등 10만여 점이 발굴된 바 있다.
|
|
|
▲ 고산리 선사유적 발굴 모습. 사진=(재)제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제주의소리 |
|
|
|
▲ 고산리 선사유적 시굴조사지에서 나타난 내부수혈 모습. 방문배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부장(왼쪽 두번째)이 발굴 현장에서 유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 한반도 신석기 유적지 중 가장 오래된 집단주거지는 제주 '고산리'
당시 발굴 작업을 통해 한반도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던 고산리식 토기(섬유질토기), 첨두형석기 등이 출토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완형의 석기 출토 유물 중에는 화살촉이 1700여점으로 가장 많았고 긁개 50여점, 창끝 40여점 등은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신석기 초기시대의 제주 고산리 선사인들은 수렵생활 중심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번 시·발굴 조사에서도 고산리식 토기와 다양한 타제석기류(화살촉, 찌르개, 밀개 등 성형석기와 돌날, 박편, 망치돌)들이 출토됐다. 이러한 유물상(遺物相)은 제주도에서 본격적으로 수렵과 채집이 이루어지고 저장과 조리시설 등 토기제작이 이루어진 시기가 고산리유적 단계에 비롯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이번 시·발굴에서 원형주거지 10동, 수혈유구 80여기, 집석유구(추정 야외노지) 10여기, 다수의 주혈이 화살촉 등의 석기류 및 고산리식 토기와 동반 출토되는 점은 한반도 최고 신석기시대 주민집인 고산리유적의 정주취락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학술자료로 평가됐다.
이번 조사에서 발굴된 출토유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결상이식’(둥근 귀고리) 1점이다. 원형 중 40% 정도가 깨진 상태로 출토됐고, 육안으로는 옅은 하늘빛과 살구빛 사이의 색으로 옥 또는 규장암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성분분석을 실시 중에 있다.
신석기 시대 전공자인 하인수 복천박물관장은 이날 설명회 자문위원으로 참석, “귀고리의 재질이 옥으로 보인다.옥은 지금도 귀하지만 당시에도 매우 귀했을 텐데 한반도 남해안 어느 지역과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며 “예를 들면 전라도 광주시에도 옥 산지가 있었다"고 말했다.
하 관장에 따르면 한국에서 옥으로 만든 귀고리가 발견된 곳은 이번 제주 고산리를 포함해 총 7곳이다. 부산 동삼동 패총·사천 선진리 유적·강원도 고성 문암리 유적·여수 안도 패총 등으로, 모두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그러나 고산 선사유적의 경우, 제주도내에 ‘옥’ 산지가 없기 때문에 1만년전 이미 제주 선사인들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육지부와의 교역물로 추정되고 있다.
# 이청규 교수, "국가사적 고산 유적지, 마을일대 광범위한 발굴조사 필요"
|
|
|
▲ 이청규 영남대 교수(고고학). 이 교수는 1990년대 고산리 선사유적 최초 발굴당시 발굴 책임자였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이날 자문위원으로 참석한 이청규 영남대 교수(고고학)도 “아직도 한반도에서는 고산리유적과 같은 시기의 유적이 조사돼지 않아서 더욱 더 고산리 유적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며 “종전 고산리 유적 발굴조사에선 약 1만년 전 유물만 확인됐지, 이곳에 살던 선사인들의 정주생활이나 가옥생활은 확인할 수 없었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 원시적이나마 가옥구조를 만들고 집단 정착생활을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앞으로 이 조사가 더욱 확대된다면 당시 1만년전 제주 최고 원주민의 마을모습을 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추가 발굴 필요성에 대해서도 “현재 해안도로변 일부 구간에선 이미 1980년대 말에 조사한바 있고, 그 이후 고산리 선사유적이 국가사적지로 지정된 후에도 일부 형질변경이 이뤄진 곳이 있어 향후 최대한 조사가 확대돼서 마을전체 범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고산리 마을 일대의 광범위한 정밀조사 필요성을 언급했다.
한편 제주 고산리 선사유적은 이번 시·발굴조사를 통해 기원전 1만년을 전후한 시기 한반도의 구석기 후기문화에서 신석기 초기문화로 옮겨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고, 시베리아, 만주, 일본, 한반도지역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 신석기 초기문화 연구의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