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론은 심리학, 사회학, 물리학, 생명과학이다
 
20년 전 여름, 나는 지방의 어느 암자에서 귀한 손님을 만나게 되었다.
 
만난지 얼마 안되어 마음이 통한, 그러나 오래 전부터 그 분의 문학작품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던 한 원로시인의 주선에 따라 만난 손님은 주교 한 분과 대여섯 분의 신부 수녀들로서 신학대학교에서 교수를 겸하고 있는 분들이었다.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시작한 이런 저런 환담은 그 분들이 참여한 저녁예불에까지 계속되었으니 꽤 오랜 시간이다. 음주가 절집 안에서는 금기가 되어 있지만 그 때는 예외로 했다. 예수의 성찬의식의 전통에 따라 포도주를 신성히 여기고 즐겨 마시는 그 분들의 뜻을 존중해 마주앙 몇병도 준비했던 기억이 새롭다.
 
어쨌던 아름다운 산세와 한여름의 녹음이 우거진 산사의 청정한 분위기에서 가톨릭 신학자와 불교 승려가 마주앉아 공양을 같이 나누고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리 흔치않은 일일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차와 과일을 들면서는 본격적으로 대화가 이어졌는데, 어느 지방의 대학장을 맡고 있는 신부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개도 되고 소도 되고 또 짐승이 사람으로 환생한다는데 그 것을 윤회라고 한다지요?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의 표정을 보니 마주앙을 몇잔 마신데다가 약간 열이 올라 상기한 상태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때만해도 나는 불교학이나 사회학문을 충분히 체득 못했던 터라 쉽게 설명을 못했으나, 내 기억으로는 당시 윤회설을 인간과 만물의 순환원리로 이해해야 된다고 말한 것 같다. 쉽게 말할 수 없는 형이상적 문제를 두고 한 이런 직접적인 질문을 직설로 바로 대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서 지금도 다만 원리나 간접적인 비유로 대답할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 때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모든 사람들이 침묵을 지켰으나 지인인 원로시인이 어색한 분위기를 조정하는 뜻에서 불교의 윤회설은 범신론으로 자연의 순환원리라고 본다며 나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의외였다. 그 분의 젊은 시절, 한분의 문단 대표시인과 승려시인 셋의 지상토론에서 본 그 분의 견해인즉 범신론은 혹세무민의 미신이요 유일신 하나님만이 우주와 자연의 주체라고 하신 분이 어떻게 지금은 180도로 달라졌을까 하고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돌아가시기 몇해 전 그 분의 대표작품은 <하나의 물방울과 작은 시냇물이 모여서 흘러 흘러 강과 바다가 된다>는 범신론적인 작품을 남겼다. 생명 하나 하나가 신의 창조물이라 여기는 극히 단순한 논리의 기독교인에게는 이단같은 말이지만 모든 생명의 상생과 조화가 화엄의 세계, 즉 존재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범신론적 사유인 것이다.
 
<윤회는 모든 존재의 현실이다>
 
불교적 사후관인 윤회의 문제를 좀 더 쉽게 접근해 보자.
 
인간은 죽으면 끝이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람, 인간과 생명은 단지 물질로 이뤄졌을 뿐 사후엔 영혼도 사라진다는 유물론적 이론이 있고, 영혼은 있으되 죽으면 신의 의지와 심판의 타력에 의해 천당과 지옥에 갈 뿐이라는 유일신적 흑백론.양극론 등의 유신론,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윤회한다는 윤회론이 있다.
 
동양의 가장 오래된 종교이자 정치철학인 유교에서 공자는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라며 내세를 모르거나 부정했다. 그래서인지 불교국 고려를 쿠데타로 뒤엎고 조선왕조를 세운 성리학 이론가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불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로서 부처의 기도나 윤회인과설은 혹세무민이다"라며 부녀자들의 사찰출입도 금지한 불교의 탄압을 합법화시킨, 500년 불교말살의 일등공신이자 사대주의적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의 일등개국공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피나는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이방원(태종)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 인과법칙과 윤회가 마냥 헛된 것은 아니었다.
 
하루 24시간 동안 우리 인간은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아침에 일어나 집 앞 공원으로 나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심호흡을 해 본다. 그 시간만큼은 무념무상, 곧 뇌와 마음이 빈 상태로 가벼운 운동이나 산책 아니면 명상의 시간도 좋다.
 
그 때가 바로 천상이요 천국이 아닐까.(천국의 시간이 너무 많은 게 탈이다)
 
집에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뉴스와 신문을 보며 사랑하는 가족들과 정겹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바로 인간으로서 누리는 인간세상이다.
 
옷을 갈아입고 회사에 출근하거나 일을 위해서 문 밖을 나서면서부터는 많은 사물과 부딛히고 경쟁하며 가족들과 잘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야말로 아수라같은 치열함과 사나움으로 세상과 대적하니 바로 아수라 세상이다.
 
순간의 판단이 잘못되어 범죄를 저지르고 평생의 위업인 재산을 탕진한다.
 
예컨데 사소한 말다툼으로, 또는 견물생심으로, 사람보다 돈이 더 탐나서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게 된다. 매일같이 매순간 일어나는 짐승세계가 아닌가. 바로 축생세상이다.
 
경제대국이라는 한국에서 어떤 이는 배가 너무 불러서 태평천국을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너무 배가 고파서 고통스럽다. 밥을 굶은 사람이 날로 늘어가고(특히 배고픈 북한인), 상류층이나 비만환자는 살을 빼느라 고생하고 온통 다이어트 붐이다. 더 배를 채우고 새 곳간을 짓느라고 난리를 친다. 옛말에 만석꾼 부자가 한 섬을 채우기 위해 가난한 사람의 곳간을 넘본다는 말이 있고, 돈 많은 부자가 구멍가게의 푼돈을 보고 탐낸다.
 
(태산같은 산림과 자연, 관광객의 푼돈밖에 없는 불교재산을 엄청난 갑부인양 여긴다. 돈 많은 개신교는 불교가 부자거지라고 손가락질하고, 돈 많은 가톨릭은 불교가 알부자라고 한다. 어떤 것이 맞는가 물으면 이유도 모른다. 연관성이 떠올라 옆길로 갔다.)
 
무지하고 사납고 탐욕스러운 양육강식의 세계가 바로 아귀세상다.
 
매일같이 교통사고로, 불치병으로, 자살 타살로, 독재시절때는 인권탄압과 고문 지명수배로 사람들이 죽고 지독한 고통을 받으니 바로 지옥세상이다.
 
매시간마다 자신을 관찰해 보자.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국이 바로 자신의 삶 속에 자신의 마음 속에 시시각각으로 일어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육도윤회는 사후세계에서 찾지말고 바로 현재 여기에서 자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윤회는 과거며 현재요 미래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억울하게 한을 품고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전쟁, 병, 사고, 자살, 타살, 고문 등으로 죽은 생명들.... 특히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태아형의 죽음을 두고 <죽으면 끝>이라면.... 너무 허무한 유물론적 사고방식이 아닌가.
 
유물론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인간과 모든 생명체가 일회용 소모품이요 시계의 부속품으로 생명의 가치와 고귀함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유신론, 무신론을 내세우면 신이 만물의 중심으로 삼는 중세시대와 마르크스 이론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존재가 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은 단지 신을 믿는 신본주의시대의 개념으로서 근세 이전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인본주의시대를 지나 생명과학과 우주시대를 맞고 있지만 인간의 과거에 대한 기억과 뇌의 구조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 수구보수주의에 머물고 있다.
 
한국에 몇번 다녀간 프랑스 베스트셀러 작가 베르나르 베베르(파피용 등)의 작품세계는 17세에 접한 티베트불교가 깊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개미, 뇌 등에서 인간의 업은 사라지지 않고 윤회하면서 기록된다고 한다. 뇌는 필름창고같이 무한한 시간, 즉 전세, 현세, 미래세를 기록하는 것으로 불성을 상징하며 작은 우주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인간의 운명 내지 삶은 어떤 절대자가 정해주는 숙명이 아니라 업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 가는 창조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범신론의 만물평등, 유신론의 만물차별>
 
불교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복합적이고 융합적인 연기, 인과, 공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왜곡될 수 있다.
 
선불교에서는 유심론을, 밀교에서는 범신론을, 화엄학은 우주론과 생명과학이 되고, 법화경에서는 세상의 구원사상, 금강경에서는 교만을 없애는 예지를, 능엄경은 우주의 기원을, 아함경에서는 도덕율이 핵심이다. 원각경은 인간이 부처가 되는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고, 용수, 마명, 원효는 인간과 세계가 어떻게 공존해서 평화를 이룰지 철저히 분석한 대승불교의 대사상가이며 따라서 대승불교는 인류공존의 원리를 밝히는 인류평화학이라 할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인간의 초심리학을 다루고, 인류역사의 오래된 윤회, 만물유전론은 일찌기 이집트,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인도 전역에 퍼졌던 학설이요 신앙이었으나 기독교의 유일신앙이 세계를 정복하면서부터 금기로 굳어진 것이다.
 
나는 윤회, 인과, 공사상, 범신론, 무아론을 체득하기까지 평생의 시간이 걸렸다.
 
동서양 철학서를 비롯한 각종 역사서, 사상서, 다윈, 뉴턴, 아인슈타인의 과학, 유불선의 서적과 스승을 찾았고, 그것도 모자라 인도, 티벳,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외 넓은 땅을 헤메면서 얻은 깨달음은 <문화인류학의 총체는 불교>라는 것이다.
 
윤회, 공사상은 심리학, 생명과학, 종교, 철학, 정신의학, 사회학, 천문학, 지리학같은 고도의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것을 단지 특정종교의 교리, 신앙차원에서 보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것으로 본질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불교(밀교)에서 윤회는 실상을 말한 것 뿐이다. 윤회가 목적이 아니다. 끝없이 죽고 태어나는 생사윤회의 삶을 벗어나 영원한 삶을 추구하고 얻으라고 하는 것이다. 번뇌와 고통, 상극과 대립, 허무의 불행한 삶에서 해탈과 열반(자유(해방), 평화, 행복)으로 인도하고저 한다.
 
도올 김용옥의 친형인 한국기독교과학협회장 김용준 박사는 몇해 전 신동아 인터뷰에서 인간과 벌레는 유전자가 98% 일치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눈으로 보는 인간과 짐승, 동물과 곤충은 전혀 다른 세계이며 차별적으로 보 지만, 생명과학에서는 불과 2% 차이라고 하니 충격적이 아닐까.
 
500만년 진화된 침팬지와 인간의 차이는 1%, 즉 99%의 유전자가 동일하다고 보면 인간은 원숭이와 사촌이다. 불교적으로 보면 억겁의 시간, 인간의 시간이 아닌 우주와 생명의 시간, 곧 윤회를 반복해서 오늘을 만든 것이니 그야말로 백천만겁난조우다.
 
신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만물을, 강자가 약자를, 동물이 식물을 지배한다는 만물지배론이나 약육강식론은 강자에게 축복을, 약자에게 저주와 죽음을 합리화시키는 권력도구였다.
 
반대로 풀을 먹는 동물과 약한 동물이 있기에 강한 동물이 있는 것이며, 육식보단 채식이 장려되고, 모든 동식물 때문에 인간의 삶이 유지된다는 상생화합의 겸손한 철학과 평화주의는 어떨까.
 
이미 서구의 육식성 정복주의는 스스로의 미망을 깨닫고 동양의 자연환경주의, 채식주의, 평화공존주의, 신과 인간의 이원론이 아닌 모든 생명체의 소중함을 말하는 범신론, 생명과학주의의 윤회, 인과, 무아, 공을 인식하고 폭넓게 실천하고 있다.
 
강을 건너는 뗏목이나 병을 고치는 약이 방편이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윤회론은 중요하다. 방편, 혹세무민으로 윤회를 보는 사람은 단순논리에 집착하거나 심안(心眼)이 열리지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윤회론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큰 '지구생명'이란 나무에서 나온 공존, 평등,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윤소암 (시인·시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