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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우리의 역사가 일본에 의해 얼마나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는가를 말해주는 중요한 사실이다.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우리역사를 주도적으로 왜곡했고, 해방 후 경성대(서울대)에서 왜곡된 역사를 가르쳐온 강단 사학자의 거두 故 李丙燾씨가 임종하기전 역사 왜곡의 사실을 발표한 문서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밝혀진지 17년이 지난 이 시간에도 소위 강단사학자 들은 역사적인 사실 앞에 반성하기는 커녕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 몰두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檀君은 神話아닌 우리國祖

- 원로 문헌 사학자 이병도(李丙燾)씨 조선일보 특별기고 -
〈조선일보 1986년 10월9일(목)자〉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

대체 天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天을 君長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開天節은 즉 「君長을 開設한다」는 것이 되므로 開國, 建國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開天은 즉 最古 시조인 檀君의 즉위와 開國을 의미하는 開天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三國遺事 紀異 제1권의 「古朝鮮(王儉朝鮮)」條에 의하면 『檀君王儉이 阿斯達에 도읍하고 國號를 朝鮮이라 하였다』고 했다.

단군의 아버지 桓雄이 「弘益人間」의 理念을 가히 실현할 만하므로 하늘이 그를 인간세계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桓雄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頂 神檀樹下에 내려와 이곳을 神市라 하고 그를 桓雄天王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는 風伯(風神) 雨師(雨神) 雲師(雲神)의 三神을 거느리고 主穀 主命 主刑 主善惡등 무릇 人間三百六十餘事를 主管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일견 지상국가를 천상국가의 한 연장으로 觀念한데서 생긴 신화와 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하면 桓雄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국가를 개창한 君長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의 百事를 주관하는 守護神的 성격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서낭당은 천왕당

이 守護神의 住處는 곧 神壇樹로 이것은 지금 民俗중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곳이니 仙王堂(서낭당)은 즉 天王堂인 것이다. 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神壇樹 그것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 神壇이다. 그리고 옛날에 이 神壇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 神市였던 것이다.

神壇樹는 실상 원시사회의 수목숭배(樹木崇拜)에서 시작되어 처음에는 樹木자체가 神 그것이었는데, 그후 변천하여 神壇樹는 天神 天王의 降下階段, 혹은 天王의 住處 또는 그것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하고 옛날의 國號는 대개 도읍지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단군의 도읍지라고하는 아사달(阿斯達)이 정작 국호였고 朝鮮은 후에 이르러 「阿斯達」을 雅譯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서울大 논문집(社會科學)제2집에 「阿斯達과 朝鮮」이란 졸고를 통해서 자세히 발표하였다. 환웅천왕이 熊女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古記에 전하여 오지만 여기의 웅녀는 古記에는 熊이 女神으로 化한 것이라 하나 이는 熊(곰) 토템族의 여자로 해석하여야 옳다고 나는 年來 주장해 오고 있다.

즉 熊을 神聖視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 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 그리고 보면 웅녀는 地上族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天上族, 天神族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은 즉 이 천신족과 지신족과의 결혼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0월3일(음력)을 開天節이라 하여 단군의 開國日로 기념하여 온 데는 역시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十月節은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 달이다.

즉 十月節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 관계를 가졌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 계절이란 것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계절마다 부락공동체의 종교적 대제전이 행해져 신인공락(神人共樂)의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이를 季節祭(Season festival)라고 하는 것인데 계절제중에서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落種(下種)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 전자는 즉 神에게 年事의 豊登을 기원하는 것, 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薦新祭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 「Thanks giving」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落種期의 祭典을 五月에, 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天神에게 제사하고 歌舞와 飮朱로 주야를 쉬지 않고 즐겁게 놀았는데(君民이 同樂하였는데) 이 제사를 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후세에 5월端午를 수릿날이라 하며,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며 十月을 상달이라 하여 초생에 집집이 神에게 고사하고, 선조무덤에 時祭를 지내는 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五月祭 十月祭의 遺風이라 할 것이다.

「상달」은 「수리달」

「수리」란 말은 上,高,山,神 등을 의미하는 古語로 그 어원은 「솟」「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보면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도 즉 「수리달」의 譯으로 볼 수밖에 없다. 夫餘의 迎鼓祭, 高句麗의 東盟祭, 東濊의 舞天祭가 다 이러한 추수감사제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燃燈大會, 八關大會도 春冬二期의 국가적 대제전이었지만 그중에도 가장 성대하던 것이 仲冬八關이었다. 그런데 최근세 갑오경장이후로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앙양됨에 따라 이 10월절의 古俗을 갱생시켜 이로써 檀君立國의 開天節을 삼은 것은 오랜 전통에 기인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민속에 흔히 음력10월초생 특히 3일에 「고사」를 지내왔다는데 왜 3일을 택했느냐 하면 3이란 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되는 수인 까닭이다. 3은 鼎足의 수인만큼 안정감을 가진 것이니 1이나 2는 실상 不安定監의 수이다.

일제의 멍에를 벗고 해방이 되자 그 해로부터 개천절을 우리의 전 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행하여 오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양력 10월3일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 말한 것들은 졸저 「斗溪雜筆」에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顯正會理事 李喜秀씨가 1977년 10월 「顯正誌」에 「史書上에서 본 國祖檀君」이라는 제목하에서 三國遺事의 저자 一然이 지금은 없어진 「古記」와 「舊三國史記」와 현존 魏書와는 다른 또 하나의 魏書의 檀君記事에서 인용하였다고 그 출처를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事大의 입장에서 기술한 三國史記의 저자 김부식도 삼국이전의 史記를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고조선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단군에 관한 記載를 제외하였지만 同書卷十七 高句麗本紀五 東川王二十一年春二月條에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惑云王之都王儉」이라고 하였다(惑云이하의 王之는 王노릇을 하였다는 動詞로 읽어야 하고 「都王儉城의 都도 동사로 읽어야 할 것을 잘못 「王之都王儉」이라고 連書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때의 平壤은 지금의 평량(平土良)이 아니라 고구려의 黃城(皇城, 즉 丸都城)의 對岸인 東黃城(今江界)인 것이다. 지금의 평량에는 아직도 이때 樂浪郡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仙人王儉之宅」이라고 한 평량은 후일의 평량(지금의 평량)의 지칭이므로 前後者를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당시 平壤은 다른 곳

金富軾과 같은 史家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古聖箕子之宅이라고 하지 않고 仙人王儉之宅也라고 한 것은 金富軾의 머리속에 지금의 평량이 仙人王儉의 도읍지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史實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內外史書들이 한결같이 지금의 평량을 王儉城이라고 하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김부식이 古記를 인용한 부분을 보면 ①史記地理誌高句麗條에서 古記云朱蒙自夫餘逃難至來本則紇升骨城 ②史記 志一 祭祀條에서 「古記云溫祚王二十年春二月設壇祀天地」 ③史記 列傳 金庾信上에서 金春秋가 講和하려고 高句麗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 「此與本言眞平王 十二年所書一事而小異以皆古記所傳故兩存之」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古記에는 檀君記史가 기재되어 있을 뿐아니라 그 기록이 高句麗에 金春秋가 갔던 西紀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金富軾이 史記 高句麗本紀 東川王二一年書二月條에서 「평량은 본래 仙人王儉의 宅」이라고 한 것은 역시 古記이거나 檀君記를 인용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金富軾은 三國史記에서 新羅의 六村도 朝鮮의 遺民이 山間에 와서 자리잡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三國史記 卷第一新羅本記第一에 보면 「始祖姓 朴氏‥卽位居西干時年十三國號徐那伐先時 朝鮮遺民分居 山谷之間爲六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一然이 인용한 古記의 檀君記載를 근거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金富軾이 평량이 仙人(檀君)王儉의 宅이라고 명기한 데서 古記가 檀君記事를 實載하였다고 볼 수 있다. 一然이 마치 근거도 없는 古記를 들먹여서 檀君記事를 지어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여러차례의 國難을 겪으면서도 檀君廟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때에는 노래(世年歌)에 의하여 檀君의 사적을 전해 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록권40 세종10년 戊申6월條에 柳寬의 上書를 보면 文化縣 九月山 東嶺허리에 神堂이 있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北壁에 환웅천왕, 동벽에 환인천왕, 서벽에 단군천왕을 모셨는데 文化縣 사람들은 이를 三聖이라고 일컬으며 산아래 부락을 聖堂里라고 한다고 하였다. 柳寬은 그 上書중에서 「九月山은 縣의 主山이던 檀君朝鮮 때에는 阿斯達山이라고 하였으며, 新羅에 와서 闕山이라고 고쳤다. 그때에 文化縣을 闕口縣이라고 처음에 이름하였다. 高麗때에 儒州監務로 하고 후에 또 文化縣으로 고쳤다. 산 이름의 闕자를 느리게 소리내어 九月山이라고 부른다.

두 首의 시에 나타나

文化의 동쪽에 藏壯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다. 父老들이 전하기를 檀君의 都邑地라고 한다‥」하였으며 「九月山下에는 桓雄을 南面으로 모시고 東西向으로 桓因과 檀君을 모신 三聖堂이 지금도 존재하며 檀君이 立都하였다는 자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世宗18년 丙辰 12月丁亥條 柳思訥(柳寬의 조카)의 上書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臣以世年歌考之檀君初都平(土良)後都白岳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基歌曰亨國一千四十八至今廟在阿斯達則등無所처乎又況高麗建廟於九月山下其堂宇位版猶存與世年歌合」.

이로써 보면 古記 檀君記 외에 歌詞형식으로 된 檀君記事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世年歌는 사실들과 부합되니 檀君記載에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 柳思訥은 漢城府使를 지냈는데 또 상서하기를 「臣이 檀君世年歌를 보니 檀君은 朝鮮의 시조입니다. 그 출생이 일반사람과 다르고 沒함에 神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쨋든 朝鮮世宗代까지 檀君世年歌가 남아있었고 識者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기해 둘 만한 사실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柳寬의 上書에 따르면 三聖堂은 黃海道 九月山 東嶺에 있다. 柳寬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父老들로부터 檀君事迹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三聖堂에 桓雄天王을 上座에 모셔서 南面하게 하고 東壁에는 桓因天王을 모셔서 西向하게 하고 西壁에는 檀君天王을 모셔서 東向하게 하였다고 한다. 三聖堂의 경내외에는 새짐승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산짐승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뭄이 심할 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文獻備考 卷64 札考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三聖祠는 황해도 文化縣 九月山에 있으며 桓因 桓雄 檀君을 모셨으며 春秋로 제사를 드린다 하고, 역시 文獻備考에 의하면 조선조 成宗13년에 황해도 관찰사 李芮之의 말에 좇아서 九月山에 三聖廟를 세우고 평낭(土良)의 檀君廟의 예에 따라서 매년 香祝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東國輿地勝覽 卷42 文化縣祠廟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三聖祠는 桓因 桓雄 檀君의 祠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 때 빌면 효험이 있다.」 「東國輿地勝覽 卷51 平낭條」에 보면 두 首의 詩를 통하여 「開國한 지가 멀고 먼 檀君은 朝鮮始祖이다. 檀君의 역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 堯와 함께 開國하였다고 들었으니 去今 四千年이며 檀君廟를 남겼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主體思想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선 양조를 통하여 1천년간에 단군에 대한 국가적 태도는 廟를 세우고 祭祀를 받드는 등 자못 융성하였다. 이것은 단군을 國祖로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세종때 새 祠堂 지어

文獻備考 卷13 輿地考1 歷代國界1에서는 檀君朝鮮國을 첫머리에 싣고 遺事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白嶽은 지금의 文化縣이며 九月山의 본명은 闕山인데 檀君의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 闕山은 소리를 느리게 내어 闕山이 구월산으로 와전되었으며 九月山의 藏唐京은 또 藏藏坪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세종때의 司은注簿 鄭陟(정척)의 상서에 의하면 「평낭의 箕子祠堂에 가보니 箕子의 位牌는 북쪽에 있어서 南向하였고 단군의 위패는 동쪽에 있어 西向하였다. 臣의 생각으로는 단군은 唐堯와 같이 입국하였고 箕子는 武王의 명으로 朝鮮에 봉하여졌으니 帝王曆年數로 보더라도 帝堯에서 武王까지는 1230여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箕子가 북향하여 南面하고 箕子보다 앞서서 立國한 檀君을 東쪽에 配享하는 것은 立國傳世의 선후에 위배됩니다. 臣이 本朝의 諸祀儀式을 고찰해보니 檀君祭의 陳設圖에 이르기를 「神位는 堂의 중앙에 모셔서 南面토록 되어있으며 臣이 箕子祠에서 본 西向의 坐는 陳設圖와 맞지 않다. 만일 단군을 箕子와 나란히 南向하게 하더라도 단군을 上座에 箕子를 다음에 앉히는 것이 立國의 선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箕子祠堂인데 단군을 주신으로 하는 것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臣의 생각으로는 따로 檀君祠堂을 지어서 단군을 南向하게 하고 제사를 받들면 祀儀에도 맞을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札曹에 명하여 鄭陟의 장서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단군은 역대왕조에서는 國祖로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었으니 箕子보다는 上位로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檀君의 祭享이 끊어진 것은 日帝 때부터였다고 본다.

檀君朝鮮 연구 숙제

三國遺事의 檀君記載는 他書 등에서 뒷받침되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믿을 만한 것이며 一然의 창작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一然이 인용한 古記도 金富軾의 인용古記와 일치되는 바가 많으므로 古記는 당시에 분명히 있었으며 金富軾도 仙人王儉과 그 도읍지를 평양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古記에는 檀君史記가 분명히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檀君의 世年歌가 전하여져서 많은 識者들이 알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 檀君의 祠廟祭天壇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또 享檀君陳設圖가 世傳되어 왔고 그것은 檀君祭儀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역대왕조에서는 朝議에 의하여 建廟 奉祭祀했던 것이다. 만일 檀君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檀君과 檀君朝鮮에 관한 記載는 숙제로 남길지언정 신화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三國史記에서 檀君記載를 제외한 것은 金富軾의 事大的 태도보다는 ①삼국사기의 명분상 삼국이외에는 夫餘등도 모두 제외하였으며 ②신라중심의 삼국사로 하였고, 신라보다 상대의 역사는 피하려고 한 데다 ③단군을 부인하려는 생각보다는 신라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

식민사관을 계승한 이병도사관

이병도(李丙燾 1896∼1989)
1927 '조선사편수회'로 국사 연구 시작
1934 진단학회 창설, 대표
1945∼62 서울대 문리대 교수
1955∼82 국사편찬위원
1960 문교부 장관
충무공훈장, 문화훈장대한민국장, 학술원상, 국민훈장무궁화장,
인촌(仁村) 문화상, 5·16 민족상 수상




●이병도사관과 그 비판
'이병도사관'이란 명칭이 쓰인 것은 이병도가 우리 나라 국사학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던 1970년대 중반부터였다. 일제하 '진단학회' 활동 성과를 기반으로 해방 후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대학에서의 후계 양성 등 국사학계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되던 이병도는 1960년 허정 과도정부 하에 문교장관 등을 지낸 바 있으며, 박정희 정권 하에서는 5·16민족상 외에도 대통령 표창까지 받는 등 국사학계에 미친 그의 공로가 대외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일제하 '조선사편수회' 등의 활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병도사관의 뿌리가 일본의 식민사가들의 깊은 영향하에 성장해 왔다는 사실 역시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병도가 학계의 원로로 자리를 굳혀가던 시기인 1970년대 중반에 그의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이 잡지에 공개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당시 국사학계는 식민사관 논쟁에 휩쓸리게 된다. 그러나 국사학계 내부에서는 자신들의 식민사관적 잔재에 대한 내부 척결 운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대부분 일제하의 활동을 은폐하거나 해방 이후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워 일제하의 활동을 합리화하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이병도사관에 대한 비판은 {자유}지 1976년 7월호에 실린 [이병도사관을 총비판한다] [이병도 저 '한국고대사 연구'를 논박한다]는 글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외에도 진보적 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비판은 이루어져 왔으나, 그가 일제하에서 진단학회 등 일제에 맞서 학문적인 투쟁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그의 식민사관 정립과정의 활동을 합리화하는 논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 사학계의 독자적인 사학 연구 학풍이 무르익으면서 사학계에서는 '식민사관'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발표된 앞의 글은 당시 이병도의 사학풍을 따랐던 국내 사학계에 충격과 함께 식민사관을 척결해야 한다는 일반인의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인생항로를 바꿔놓은 일인학자의 교육
이병도는 1896년 8월 14일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였다. 조기혼인이 성행하던 시대 풍습에 따라 이병도는 15세가 되던 해에 집안에서 정한 대로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 부인의 나이는 16세로 진명학교 초등과를 나와 고등과에 다니면서 신학문을 접하고 있었던 반면에, 이병도는 서당에 다니며 한문만 공부하고 있었다. 전통고수에 엄격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병도는 결혼 후 개화의 첨단을 걷는 처가의 영향을 받아 신학문에 뜻을 두고 이듬해에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다.

1910년 보성전문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3년 동안 법률 공부를 시작한 이병도는 '무미 건조한' 학문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사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사학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국제공법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적 사례들을 공부하면서였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사학의 길로 진로를 정한 그는 일본 와세대 대학에 입학한다.

그가 와세다(早稻田) 대학에 입학한 1914년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때였다. 당시 와세다 대학에는 사학과 대신 동양사, 서양사, 일본사, 사회학 등이 분리되지 않은 채 한데 합쳐진 '사학급 사회학과(史學及 社會學科)'가 있을 따름이었다. 사학급 사회학과에 들어간 그가 애초에 전공하려던 것은 서양사였다. 그러나 일본사의 권위자였던 요시다(吉田東伍) 박사의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 책을 접하고 그의 강의를 들은 뒤 국사를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이병도가 학사 1학년 때부터 가르침을 받은 요시다 박사는 일본 사학계에서 알려져 있는 석학이었으며 일본사 외에도 한국고대사 연구에도 영향력이 있는 학자로서 이병도를 비롯한 한국 유학생들에게도 영향력이 컸으며 그만큼 교분도 넓었다.

그의 영향력하에 있었던 이병도를 비롯하여 문학부에 적을 둔 한국 유학생들은 어느 날 그의 초대를 받고 간 자리에서 소위 한일합방이 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그동안 궁금했던 사안을 놓고 대화를 하게 된다. 이병도와 그의 선후배 한국 유학생들은 "일본이 한국을 동화시키려고 하는데 과연 그렇게 되겠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요시다 박사는 "단시일엔 안 된다. 그러나 앞으로 50년만 이 상태가 계속되면 반드시 동화가 될 것이다."라고 자신있게 답한다. 한국 유학생들의 질문에 요시다 박사는 소위 '일선동화론(日鮮同化論)'으로 자신있게 답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학생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이병도 스스로 해방 이후 6,70년대 잡지글에서까지 자신의 생애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준 사람'으로 꼽고 있는 일인 식민사학자 요시다 박사는 일본이 소위 한일합방 이전부터 식민사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대사 연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그는 이병도의 역사관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병도는 요시다 이후 취임한 쓰다(津田左右吉) 박사 밑에서 강의를 받으면서 국사 연구의 뜻을 굳히게 된다. 그러나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자신의 뜻을 살릴 수 없는 현실에 부딪힌다.

그는 23세가 되던 해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중앙학교에서 역사와 지리,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생활을 시작한다. 교사 생활 1년째가 되던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다. 일제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민족해방을 쟁취하려는 이 거족적인 운동에 대하여 그는 어떤 방향으로건 행동을 한 바가 뚜렷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그는 신문, 잡지 등의 각종 간행물에 원고를 발표하였지만, 본격적인 국사 연구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31세가 되던 해에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이병도는, 그가 존경하는 일본 사학자들의 지도와 전폭적인 지원하에서 본격적인 국사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활동
이병도가 국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27년경 조선총독부 중추원 산하에 조직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식민사가 이마니시(今西龍)의 수사관보(修史官補) 라는 직함을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와세다 일본 유학 시절 사학교수였던 이케우치(池內宏) 박사가 이병도를 추천하여 몇 해 동안 촉탁으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일제하 한국사 연구에 종사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른바 대일본 제국의 이념에 투철한 황국사관의 학자였다. 이러한 학자들은 조선총독부의 지원하에 경성제국대학이라든가 조선총독부 중추원 및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나, 만철(滿鐵, 남만주철도의 약칭)의 지원하에 막대한 예산으로 식민지화를 위한 조사 사업을 진행하던 만철조사부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이름난 교수들은 어느 직장에 있거나 간에 앞에 열거한 연구기관의 고문 또는 촉탁으로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들은 일본사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제국대학 중심의 관학파들이었다. 식민사관에 깊이 공감하던 이병도가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으로 임명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그가 인연을 갖게 된 사람은 일본의 사학자인 이마니시 박사와 아나바(稻葉) 박사 그리고 편수회 고문으로 있었던 구로이타(黑板勝美) 박사 등이었는데, 이병도는 그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국사 연구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가 연구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은 일본 유학 시절의 쓰다 박사와 그의 소개로 동경대학 시절 때부터 알게 된 이케우치 박사였다. 그들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병도의 국사 연구를 지도하게 되는데, 이병도는 그들의 사학적 분석 방법과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 외에도 그가 국사 연구 과정에서 관심을 가진 국내 학자는 이능화(李能和),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을 비롯하여 동예 이중화(東藝 李重華), 호암 문일평(湖岩 文一平) 등이 있었지만 앞의 일인 학자들의 영향력만큼 큰 것은 아니었다.

●일제의 조선사편수회 설치와 그 의도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기초는 식민지 경제수탈 정책과 민족동화 정책이었다. 이 중 민족동화 정책은 식민지 병합의 정당성과 식민지 통치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역사 왜곡과 이의 선전 활동이 주요한 축이었다.

일제는 조선인을 아류 일본화시키는 동화 정책을 체계적으로 수립하기 위한 기초사업으로 역사 연구에 역점을 두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사 왜곡 사업을 전개하여 식민지 통치의 일환으로 식민사학을 부식하였다. 그 첫 번째 사업이 고적조사 사업과 사서편찬이었다. 고적 조사 사업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한국사의 타율성을 조작하기 위해 시작되었고 1911년에는 총독부의 취조국과 참사관실의 주도하에 반도사 편찬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중추원으로 소관 업무가 이관될때까지 사서 편찬 계획은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각종 강연회와 선전책자를 통한 정치선전을 강화하였다. 이는 3·1운동으로 인하여 고조된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당시 한창 주장되던 '일선동조론'이나 강압만으로는 한민족의 복종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고, 조선인들이 역사서를 통해서 민족 의식 및 독립운동을 고취하고 있는 사오항에 비추어 새로운 한국사 편찬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때마침 민족주의 사가인 박은식(朴殷植)이 중국에서 지은 《한국통사》와 《한국 독립 운동지 혈사》가 국내에 유입되자, 이에 당황한 일제는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조선사》 편찬에 갑자기 열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한국 사서의 절멸책을 강구하는 것은 "노다공소(勞多功小)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민족주의 역사서의 전파를 격려할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구사서(舊史書)의 금압 대신에 공명 적확한 사서로써 대함이 첩경이고 또 효과는 더욱 현저할 것"이라고 한 데서도 엿보인다.

초기 조선사편수회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먼저 조선인에 관한 강습회를 개최하고, 1년 목표의 강의록 《조선사강좌(1923∼24)》를 간행하였다. 《조선사강좌》의 일반사 부분은 1927년 《조선사대계》로 다시 묶여 시대별로 5권으로 다시 간행된다. 여기에서는 외세의 침략과 그 영향을 과장하여 서술함으로써 한국사가 식민지 혹은 외세의 압제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강조하고, 거기에서 식민주의적 한국사관이라 할 한국사의 타율성론 도출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사강좌》가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자극을 주었는데, 이병도는 여기에 더 큰 충동과 자극을 받아 한국근대사를 연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병도의 역사 연구에 일제의 식민사관의 영향은 더욱 깊어가기만 했다.

일제는 한국인이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국사의 타율성과 정체적 성격을 부각시켜야만 하였고, 《조선사》 편찬은 정치 선전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는 의미가 있었다.

사서 편찬의 계획은 1921년에 총독의 지시로 이러한 목표에 부응할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치되면서 본격화되어 1921년부터 1926년까지 완성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최초의 계획안은 일본 사학자들과의 실무적인 협의 과정에서 수정 변경되었다. 즉 사업 연한을 10년으로 늘리고 부위원장제를 폐지하였으며, 전문 사서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1922년 12월 4일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총독부훈령 64호)이 확정, 발표되었으며, 조선사의 편찬은 총독부의 산하기관인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관장하게 되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조직은 곧 일제의 식민 정책이 단순한 금압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착상에 따라 한국사를 재조하려는 데로 나아간 것을 의미했다.

한국인들은 총독부 부속기관에 불과한 편찬위원회에서 추진하는 사서 편찬이 과연 한국사를 공정히 서술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의혹을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제가 명가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편찬 기관의 권위를 상승시킬 필요가 있었다. 즉 편찬 기관의 격과 편찬 담당자의 권위를 높여 이를 국가적 수사(修史) 사업으로 확대함으로써 《조선사》가 일당 일파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사서라는 점을 부각시켜야만 하였다. 이에 따라 종래 총독부 훈령에 근거하여 총독부 부속기관으로 있던 편찬위원회는 1923년 6월 칙령에 의해 총독 직할의 독립관청인 '조선사편수회'로 개편되었고, 아울러 조선사편찬사업은 중추원에서 분리되었다.

참가인물의 특성은 조선사의 편찬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구로이타(黑板勝美), 이나바(稻葉岩吉), 이마니시(今西龍)의 한국사 인식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편수회 참가자들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총독부 관리, 총독부 직원 및 촉탁으로 근무하였던 한국인, 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신진 사학자들이었다.

이병도는 초기에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이마니시의 수사관보로 승격한 것으로 보아, 그의 지위와 영향력, 편수회에서의 기여도를 충분히 짐작케 해주고 있다.

●식민사관 총서 《조선사》 간행 참여
이병도는 이마니시의 수사관보 역할을 하면서 그의 연구 과정에 결합하여 《조선사》 제1,2편(통일신라시대), 3편(고려시대) 편집 등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사관 수립 사업에 기여하게 된다.

일제의 한국사관이 총괄되어 있는 《조선사》는 37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방대한 연구서이다. 《조선사》 편찬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정책적으로 결정한 사업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3·1운동 후 한국인들의 독립 정신을 무마하고 이들을 회유동화시킬 고차원의 식민지 문화정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조선사》는 그들이 시행한 문화정책의 명분을 살리는 한편, 이로써 한국인의 역사 의식을 흐리게 하여 장기적인 식민지화의 포석을 굳히는 데 이용되었다. 그들의 《조선사》 편찬의도는 《조선반도사》 편찬 요지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에 있어서의 야만(野蠻)적이고 반(半) 개화된 민족과 달라서 독서속문(讀書屬文, 독서문화)에 있어서 문명인에 떨어지는 바가 없다. 고래로 사서의 존재하는 바 많고, 또 새로이 저작되는 바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전자는 독립 시대의 저술로서 현대와의 관계를 결하여 다만 독립국의 구몽을 추상시키는 폐단이 있으며, 후자는 근대 조선에 있어서의 일청, 일러의 세력 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의 향배를 말하고, 혹은 《한국통사》라고 하는 재외 조선인의 저서와 같은 것은 일의 진상을 살피지 아니하고 망설을 함부로 한다. 이들의 서적이 인심을 어지럽히는 해독은 참으로 말할 수 없는 바 있다.

결국 《조선사》 편찬의 목적은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한국통사》를 발간한 박은식의 역사 서적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자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차단하고 조선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해 '문명인'에 걸맞는 문화적 지배를 통해 장기적인 식민화를 이루려는 데 있었다. 《조선사》 간행의 장기적인 의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여기에 대하여 김용섭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조선사》는 단순한 통사가 아니고 하나의 사료집이다. 외관상으로는 모든 사료를 망라하여 서술한 것으로 되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취사 선택이 행해졌다. 그들에게 유리하고 필요한 것은 되도록 많이 채록하고 한국사의 본질적인 문제나 민족 문제, 그리고 그들에게 불리한 것은 수록하지 않았다. 《조선사》가 그들의 식민지 통제에 기여하는 바는 실로 크고 원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한국사를 서술한다면 그것은 한국사의 주체성을 살리는 역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컨대 일제의 한국사 연구는 한반도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학문적인 기반을 확립하고 한반도에 대한 그들의 침략을 학문적으로 합리화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사》의 식민사관
《조선사》 등을 통해 본 일제의 식민사관론의 이론적 기반은 한국사 또는 한국문화 발전의 '타율성론(他律性論)'과 '만선사관(滿鮮史觀)', 그리고 '일선동조론'과 한국사에는 내적 발전이 결여되고 있다는 '정체성론(停滯性論)'이다.

'타율성론'이란 한국사의 주체적인 발전과 한반도 지역의 독립된 역사성 및 문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론이다. 그 요지는 한반도의 역사가 그 주민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발전된 것이 아니라 중국, 만주, 일본 등 주변 민족의 자극과 지배에 의해서만 유지되어 왔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의 경우 소위 일본의 '남한경영설(南韓經營說)' 및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조작하여 한반도의 일부가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다 하고, 중세 시대에는 당(唐)·명(明)·청(淸) 등 중국측 여러 나라들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으나 소위 한일 '합방'으로 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며, 따라서 '합방'은 조선이 망한 것이 아니라 고대 사회의 한·일 관계로 되돌아갔다고 하는 궤변으로 '합방'을 합리화하려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는 일본인에게는 한국인과 한국사를 멸시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한국인에게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히는 심리적 근거가 되었다.

다음 한반도 지역의 독립된 역사성과 문화성을 인정하지 않는 근거는 '만선사관(滿鮮史觀)'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한반도 지역과 한민족의 역사적·문화적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만주 지역과 한반도 지역을 합쳐서 하나의 역사적 단위, 문화 단위로 인정하는 사론이다. 한반도 지역은 본래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갖지못하고 대륙에서 실패한 정치 세력이 옮겨 자리잡은 지역으로 문화면에 있어서도 대륙 지방의 주변 문화가 부단히 옮겨 왔을 뿐이어서 한반도는 대륙 지방, 특히 만주 지방과 하나로 묶어야만 그 역사 및 문화를 체계화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와 같은 '만선사관'은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이 한민족의 독립의식을 말살하고 만주 침략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며, 여기에는 일본의 만주 침략기관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만선지리역사조사실'이 한몫을 했다.

다음은 '일선동조론'이다. 이 논리는 일본 민족의 조상과 한민족의 조상은 애초에 하나였으니, 현재의 한민족도 일본 민족에 동화하여 하나로 될 수가 있다는 학설이다. 에도(江戶) 시대 국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이 주장은 일제가 한국 병탄을 합리화하는 이념으로서 내세우게 되었다. 《국사안(國史眼)》의 저자였던 호시노가 1890년에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1910년 병탄 직후 {역사지리}의 임시 중간호로서의 조선호에 당시 유력한 일제의 역사가들이 총동원되어 같은 논조를 폈던 것이다. '일선동조론'은 3·1운동의 발발과 함께 이를 무마하는 이론으로서 다시 강력하게 대두되었는데, 그 내용은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며 한민족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한국사 연구는 현실과 직결된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그것은 학문에 있어서의 식민 정책이었고, 식민지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네 번째로 주로 경제학자들에 의해 세워진 '정체성론'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식민지 사관의 근간을 이루는 소위 '정체성론'은 후쿠다(福田德三), 가와의(河合弘民), 구로타(黑田巖), 야마지(山路愛人), 기다(喜田正吉), 이나바 등과 일제 말기의 모리야(林谷克己), 시카타(四方博)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이들 이론의 내용은 일본을 비롯한 다른 지역이 세계사적인 발전 과정에 따라 시대별로 단계적인 발전을 거듭한 데 반해, 한반도의 역사는 세계사적 발전성이 결여되어 근대 초기까지도 고대사회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합방' 이전, 즉 20세기 초 조선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일본의 고대사회 말기인 10세기경의 그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일본의 조선 지배는 조선 사회의 사회경제적 수준을 고대적인 것에서 일약 근대적인 것으로 도약시켰다고 주장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론은 모두 한반도의 소위 '반도적 성격론'을 바탕으로 하여 그럴 듯하게 꾸며졌고, 또 근대역사학적 실증주의적 방법론에 의해 논증된 것같이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것은 객관성 있는 논리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으며, 따라서 일제 시대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까지 그 영향을 남겼던 것이다.

●이병도의 연구활동
조선사편수회에서 국사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이병도는 활발한 연구 성과를 발표하게 된다. 그는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기 전 한국의 근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당쟁상(黨爭史)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으나, 조선사편수회 연구 활동 과정에서 연구 방향을 유학사(儒學史)로 전환하였다. 그 이유는 당쟁사보다 유학사가 더 근본적인 요건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유학사 연구는 무엇보다도 퇴계와 율곡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유학사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의 연구 논문 주제로 '이율곡의 입산동기'를 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논문은 조선사편수회에서 발행된 {조선사학} 창간호에 발표되었다.

'조선사편수회'가 창립되었던 1920년대 후반기의 역사 연구의 학풍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박은식, 신채호(申采浩) 등에 의해 주도된 민족주의 사학, 문헌고정비평과 역사적 사실의 고증적 인식을 주로 하는 실증사학 및 사회경제사학으로 불리는 유물사관으로 분류되는데, 이러한 학풍은 1940년대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병도는 실증사학계로 분류된다.

실증사학은 당시 일본 사학계의 일반적 조류인 랑케(Leopold von Ranke)의 사학을 밑바탕으로 하여 개별적인 역사 사실의 문헌 고증을 주로 한 계열이다. 이들은 랑케의 "주관적인 판단 없이 역사적 사실을 원래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입장에서 한국사를 연구했다. 이들은 주로 일제의 고등교육을 통하여 신학문에 접했던 역사가들이기 때문에 일본인 조선학 연구가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병도는 얼마 후 고대사 연구에 착수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 이병도 자신이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그의 연구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일본인 선생들은 "그들의 정치적 요구와 학문적인 호기심으로 한국과 만주에 걸친 역사 지리에 관한 조사 사업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독려했던 것이다.

당시 이병도가 고대사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그의 스승인 이케우치(池內) 박사가 그 방면의 연구 논문을 쓰기 위해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병도에게 만주 지리 역사 연구 보고를 꾸준히 보내 주었기 때문이다. 이병도는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이 보내 주는 그 자료에 대해 "필시 고대사 연구에는 역사 지리의 연구가 기초적이고 선결 요건"임을 스스로 간파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분분한 삼한사군(三韓四郡)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병도는 자신의 연구 방향을 일본 학자들의 의도와 방향에 성실하게 따랐으며 그들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이병도 자신의 연구 주제와 관련하여 일인 학자들의 관심과 배려에 대해 깊은 감사와 은혜를 입은 것으로 생각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데서 유래된다. 그의 고대사 연구는 일본의 '만선사관' 창출과 관련하여 일제 관학자들의 연구를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일인 사학자들의 바램대로 사군 문제를 연구하게 되고, 그 연구 성과는 '진번군고'라는 논문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1927년 그는 이케우치 박사를 통해 동경제대 중심의 { 잡지}에 [진번군고]를 비롯하여 [고려삼소고] 등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본에 발표된 이 논문은 일본 동경에서 열리는 사학 대회에서 와세대 대학의 시미즈(淸水泰次) 박사의 권유로 공식 발표하기까지 하였는데,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큼 일본 학계에 선풍을 일으켰다고 회상하는 이병도는 이러한 자신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병도는 해방 이후 자신의 연구 활동을 뒤돌아보면서 "일제의 탄압 밑에 민족의 역사가 짓밟혀 가는 수난 속에서 자기 나라의 역사를 밝혀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과 책임감"이 있었다고 합리화한다. 이병도의 소박한 의무감과 책임감은 자신의 연구 결과가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식민사관 정립을 위해 설립했던 조선사편수회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공헌하고 있었음을 간과하는 주관적 의지일 뿐만 아니라 환상이며 감상적인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진단학회는 민족애의 발로인가
조선사편수회 내 한국인 연구자들의 경우, 연구 성과를 자유로이 발표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불만은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이후 한국 국사연구자들은 이병도를 주축으로 몇몇이 모여 '진단학회(震檀學會)'를 구성한다. 그기록 {진단학보}를 발행,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장을 마련하게 된다.

1934년 5월 11일에 조직된 역사연구회인 '진단학회'는 이병도 등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진단학회의 목적은 '조선 및 인근문화의 연구'를 표방한 것이었다. 즉 조선 및 인근의 문화를 연구하는 역사학·고고학·국어학·국문학·민속학 등 당시까지 고등교육을 받은 조선인학자들의 힘으로 연구, 발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설립되었다. 이 회의 발기인 및 초대 위원은 다음과 같다.

·발기인 - 고유섭(高裕燮), 김두헌(金斗憲), 김상기(金庠基), 김윤경(金允經), 김태준(金台俊), 김효정(金孝井), 이병기(李秉岐), 이병도(李丙燾), 이상백(李相栢), 이선근(李瑄根), 이윤재(李允宰), 이은상(李殷相), 이재욱(李在郁), 이희승(李熙昇), 문일평(文一平), 박문규(朴文圭), 백낙준(白樂濬), 손진태(孫晋泰), 송석하(宋錫夏), 신석호(申奭鎬), 우호익(禹浩翊), 조윤제, 최현배(崔鉉培), 홍순혁(洪淳赫)

·위원 - 김태준, 이병도, 이윤재, 이희승, 손진태, 조윤제

진단학회에는 이병도의 일본 와세다 대학 시절의 동창들과, 경성제대 출신 등 다양한 인맥과 성향의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병도를 비롯한 진단학회의 주요구성원이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활동을 계속하면서 '진단학회' 활동을 했다는 것은 진단학회가 일제의 논리를 완전히 벗어난 단체가 아님을 입증시켜 주는 것이다.

이병도가 진단학회 창설에 발벗고 나선 직접적인 동기는 일인 학자들과의 마찰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일본은 한반도를 기반으로 중국 등지로 침략 범위를 확대시켜 나감에 따라 그들의 조사, 연구 사업도 확대되어 갔다. 조선사편수회가 설립된 지 얼마 후 서울에서는 일인 학자 중심의 청구학회(靑丘學會)가 생겨나면서 일본 학계의 학술지가 호를 거듭하여 발행되고 있었다. 이마니시를 중심으로 한 {조선학보}가 발간되었는데, 이때 이병도는 {조선학보}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게 된다. 이병도는 '삼한 문제의 신고찰'이라는 원고를 써주었으나 청탁자가 다시 찾아와 다른 원고로 바꿔줄 수 없느냐고 요청했다. 그 이유는, 이병도의 학설이 이마니시의 설에 반해 저축되는 바가 많아 이마니시가 보면 학보 경영상 지장이 있을 우려가 있다는 일인 회원들의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은 {동양학보}에 실린 이병도의 '청양촌(淸陽村)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읽은 경성제대 교수 다카하시(高橋亨) 박사가 이 학보 편집자인 안확(安廓)에게 "이병도는 사학 연구를 하는 사람인데 왜 유학에도 손을 대느냐, 앞으로 손대지 마라고 일러라"라고 한 말을 이병도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일인에게 학문 연구와 관련한 제재와 모욕을 당한 이병도는 이윤재의 주선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의 후원을 얻어 진단학회를 만들게 된다. 이것은 이병도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진단학보}를 통해 그동안 발표하지 못했던 논문을 국한문으로 고쳐 발표하였다. 한인 중심의 진단학회의 창립과 학보 발간은 일인 관헌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었지만, 초기에는 직접적인 탄압은 없이 사전 검열만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전문적인 내용인지라 검열에서 특별히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진단학보}는 창간, 계간으로 14집까지 계속 발간되었다. 이병도는 이곳을 통해 역사 지리에 관한 기본적인 과제로서 [삼한문제(三韓問題)의 신고찰(新考察)]을 발표하게 된다. 이병도는 이 논문으로 일본 사학계의 모순이 많던 고대사의 제문제에 관하여 어느 정도 합리적인 해석을 얻게 되었다고 논평하고 있다. 그뒤 그는 '삼소고(三蘇考)'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을 읽은 이케우치 박사가 그때까지 미개척 연구 부분인 지리도참 사상을 밝혀나가기를 그에게 종용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병도는 그의 권유에 따라 그 방면의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지리도참 사상의 기원으로부터 그것이 우리 나라에 전수된 경로와 배경을 연구하게 되고, 이러한 문제를 핵심으로 삼아 풍수도참과 시대와의 상호관계성을 해명하는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그 연구의 성과는 {고려 시대의 연구}로 발표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진단학회'가 형식적인 면에서는 한인 중심의 학회였으나 내용적으로는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한국인의 독자적인 조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사관 연구로부터 벗어나서 국사를 연구하는 단체의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님을 입증시켜 준다. 또한 당시 일제가 관변 학술 단체 이외에 민간 단체의 결성을 오히려 독려하면서 국사 연구의 영역 확대를 꾀했다는 점으로 볼 때 진단학회의 창설 자체를 일인에 맞선 학문적 투쟁의 의미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이병도가 이끌었던 '진단학회'는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을 중단하자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김성수(金性洙) 등 찬조위원의 도움을 받으며 학보 제14호까지 발행하였다. 그러나 1943년 9월 일제 말년에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면서 한글 사용이 극도로 탄압을 받는 가운데 진단학회 회원과 이병도는 "스스로 학회를 해체하고 학보 발행을 중지" 하였다. 진단학회는 해방 후 다시 재조직되어 학보 제16호까지 발행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중지, 그후 다시 발족되어 학보는 계속 발간되었고, 이후 오늘날까지 국사연구학회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진단학회는 조선의 역사 및 문화에 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빈약할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정치에 좌우되는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한 평가 위에서 볼 때 '진단학회'는 조선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기 위한 장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그 내용은 식민 지배의 틀 속에 머무른 것으로서 '조국애'의 발로라기보다 '학자들의 이해 관계'를 담아냈다는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

●일제 학풍의 잔존과 국사학계 대부 이병도
해방 후 국사학자들에게는 일제 식민사학의 청산과 과학적 사고방식에 의한 민족사의 구축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할 책임이 부여되어 있었다. 일제 침략하에서 침윤되었던 식민사학의 모든 악폐-예컨대 정체성론, 타율성사관, 지리적 결정론, 사대주의론, 당파성 등-를 일소하고 전통 문화와 민족 발전의 저력을 역사적으로 인식시켜 주어야 했으며, 이러한 역사적 인식을 통하여 민족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러나 해방 후 국사학계는 1930∼40년대 초기에 가졌던 학풍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병도를 비롯한 실증학풍이 바로 그것이다. 1930년대에 독립투쟁의 한 방편으로 국사 연구를 했던 민족주의 사학의 안재홍과 정인보는 다른 많은 독립투사와 같이 학계를 거의 떠나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학문 연구 자체를 목적으로 했던 실증사학풍의 학자들, 즉 이병도를 주축으로 한 사학자들은 학계에 그대로 남았다.

더욱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그나마 남아 있던 다양한 국사 연구 학풍이 구축되고 실증학풍으로 단일화되면서 실증사학자들이 우리 나라 국사학계의 핵심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국전쟁 전에 이미 많은 유물사관론자들이 연구의 장을 달리한데다가, 한국전쟁때 다수의 민족주의자들이 납북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전쟁 이후 거의 10여 년간의 남한의 국사학계는 주체 부재, 민족 상실의 침체기를 맞았고, 특히 동서 냉전 체제의 강화로 민족주의의 금기와 구미문화에 대한 의존도가 극도로 심화되면서 민족주의적 국사 연구는 상실되고, 일제가 남겨놓은 식민사관을 뿌리로 하는 국사 연구가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한 실증학풍은 그 형성 시기인 1930∼40년대 일제의 탄압 강화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민족 운동의 예봉마저 꺾인 상태에서 성장했다는 점에서 식민사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실증사학이 개별적 사실의 고증에 치우쳐 있었으며 개별적 사실의 고증이 전체 사회에 어떤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으로 연결되는지, 일제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활용되는지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다는 점에 대한 비판이 1970년대 후반에야 일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 국사학계의 주요학자인 이병도, 신석호 등은 일본 유학을 거쳐 조선사편수회에서 다년간의 '수학'한 후 '국사편찬위원회' 핵심으로 들어앉았다. 특히 조선사편수회 등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의 절대적인 영향력에 의해 지도되고 성장한 이병도의 경우 국사학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활약했다. 그로 인해 그의 식민사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가 창립되었을 때 진단학회 회원들이 서울대 교수로 대거 진출함으로써 국사학계의 주요 인맥을 형성하였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는 진단학회 주요 멤버였고 와세다 대학 출신인 이병도와 경성제대 출신의 이인영(李仁榮)에 의해서 재건, 창설되었다. 동국대학 사학과는 불교학과·국문학과와 더불어 가장 먼저 설립되었는데 이병도는 초기부터 국사 강의를 맡았다.

한편 이병도는 진단학회를 계속 이끌면서 연구활동을 하였는데, 1955년에는 우리 나라 정치기구의 역사적 고찰 등을 연구하였으며, 그 일부분이 서울대학 논문집에 발표된 '남당고'였다.

●이병도사관은 극복되었는가
해방이 되던 해 50세를 맞이한 이병도는 이미 학계의 원로 지위를 누릴 만큼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었다. 그의 연구 성과가 일제하의 것이기는 하였으나 진단학회 활동이 그의 일제하 활동을 합리화시켜 주는 좋은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해방 이후 그의 주요한 근거지는 '국사편찬위원회'라 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애초에 '국사관'으로 출발하였다. 일제가 미국에 항복한 이후 미군정하에서 민족사료의 유실을 막기 위하여 민족사료를 집중적으로 관리할 목적으로 설치된 '국사관'은 1946년 일제 시대 중추원 내에 있던 조선사편수회 사무실에서 업무를 개시하였다. 국사관은 1948년 혼란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본격적인 체제정비를 이루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역사 편찬 기구의 설립 필요성에 따라 1949년 3월 조직되었다. 이병도는 진단학회와 대학교수직을 중심으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55∼82년까지 국사편찬위원으로 재직하였다. 이때 편찬위원으로 진단학회 발기인이던 이병도, 백낙준, 김상기(金庠基) 등이 함께 참가하였다. 이곳에서 이병도는 《한국사》 발간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사 총괄서를 저술함으로써 역사학계 최정상의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한편 이병도는 국사편찬위원회 참여 이전인 1950년 국방부정보국 전사편찬위원장을 맡아 활동했으며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한국사)·서울대 대학원장, 1955년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장, 1956년 진단학회 이사장·회장 등을 겸직하는 등 학계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이병도가 학자의 위치에서 일시적으로 외도를 시도한 것은 1960년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이 하야를 발표한 뒤 구성된 과도정부 때였다. 선거 관리 내각인 과도정보는 1960년 4월 25일∼28일에 걸쳐 조각(組閣)을 완료하였고,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 사태수습을 맡은 허정 과도 수상은 28일 조각 명단을 발표하였다. 이 과도 내각 구성에서 문교부 장관을 이병도가 맡게 되었다. 이 과도정부는 사태수습을 위해서 5대정책을 발표하는데 그 중에 특이한 것은 '한일관계의 정상화, 일본인 기자의 입국허용' 등을 주요내용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실제 정책을 실행하지는 못했으나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들고 나온 과도정부는 그들의 인맥이 친일 세력에 뿌리를 둔 내각이라는 의문을 낳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과도정부는 신구파간의 대립으로 인해 4개월로 단명하였고, 그에 따라 이병도의 정계 진출도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막을 내렸다.

또한 1960년도에 들어서면서 그는 학술원 회장을 비롯하여 각종 대학의 명예교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한국사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그는 충무무공훈장, 서울시문화상, 문화훈장대한민국장, 학술원상, 국민훈장무궁화장, 인촌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여받는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학계의 대부로 자리를 굳혔다. 그런 이유로 이병도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제대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일제 시대의 식민사관을 창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조선사》 편찬을 거쳐 해방 이후 친미 세력인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등 권력자들의 국사학 창출로 이어지고 있는 이병도의 국사 연구 행로는 그야말로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하는 역사적 이론 근거를 마련하는 연구로 계승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후배양성으로 제2, 제3의 식민사관 학자를 배출함으로써 국사학계는 여전히 일제가 심어 놓은 잔재에 지배당하고 있는 셈이다.

일제 시대로부터 미국의 지배로 넘어오는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직접 간접으로 제국주의 세력의 지배를 강요받아온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일제가 심어 놓은 '식민사관'은 뿌리가 뽑히지 않은 채 끊임없이 새로운 덧칠을 하며 새로운 얼굴로 모습을 바꾸어 왔을 뿐임을 확인하게 된다.

김정희(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 참고문헌
이병도, [진단학회를 통해 본 학술적 투쟁], {신동아}, 1968.7
-----, [화려한 우정 50년], {월간중앙}, 1970.3
-----, [부덕(婦德) 60년의 회상], {월간중앙}, 1970.9
-----, [나의 연구생활의 회고], {사상계}, 1955.6
이용림, [이병도사관을 총비판한다], {자유}, 1976.7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윈회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강만길,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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